‘캐비닛’ 속에 괴물이 산다 ; 두 번째 ‘백수’ 이야기
‘캐비닛’ 속에 괴물이 산다 ; 두 번째 ‘백수’ 이야기
  • 김영삼 시민기자
  • 승인 2009.11.0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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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김언수/문학동네

▲ <캐비닛>책 표지.
소설사에 등장하는‘백수’(그것이 비단 경제적 소수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면)들의 징후는 오래전부터 아주 농후하다. 푸코에 말을 비려 그들은 한 사회의 에피스테메에 의해 구분지어지고 타자화 되고 정서적으로 격리된 대부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은 언제나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유전적 결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백수들의 계보를 가까운 과거로부터 추적해보니 두 번째로 발견되는 소설이 바로 이 『캐비닛』이다.

마치 어느 비밀정보부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파일처럼 그것은 감추어져 있지만 아주 오래된 이 땅의 소수자들의 역사를 먼지와 함께 쌓아놓고 있었다. 먼저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심토머, 13호의 소수자들!

이 소설은 ‘심토머’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었던 새로운 인간 종, 과학의 현미경에서 벗어나면 뭐든지 마법과 이단이 되어버리는 이토록 이상한 과학의 세상에서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이 골방에 처박혀 답답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심토머’라고 명명한 그들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뜬금없이 사라져버리는 타임스키퍼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인간, 즉 도플갱어가 존재하는 사람도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가 있는 한편, 한번 자기 시작하면 몇 달을 내리 자는 토포러도 등장한다.

자신의 과거 기억을 마음대로 삭제·변형하는 메모리모자이커도 있고 자신의 혀에 도마뱀이 붙어 있거나 자신의 손가락에 은행나무가 서식하는 사람도 있다. 유리와 휘발유는 물론이거니와 신문이나 강철을 먹는 사람도 나온다. 이 모든 사람들을 소설 속에선 심토머(symptomer) ㅡ 즉, “징후를 가진 사람들” ㅡ 라고 부른다.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비해 생물학적 본질을 변화시킨 사람들이다. 그들은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며,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인 동시에 “최후의 인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30p)는 사람이다.

결국 이 소설은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어왔던 새로운 종에 관한 이야기”이며, “진화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33p)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인공인 ‘나’가 일하는 장소의 13호 캐비닛이란 곳 안에 파일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리얼리즘을 비웃다

물론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소설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당대의 한국 소설은 리얼리즘이라 불릴만한 겉옷을 벗어치운 지 이미 오래다. 이를 두고 환타지라거나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라고 부를 것도 없다.

소설은 어차피 거짓부렁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현실성이 없더라도, 말도 안 돼는 이야기라도 한 번 참아주고 읽어보자는 말이다. 

이렇듯 오로지 환상에만 의존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 캐릭터들은 잘 살펴보면 현실의 표피를 뚫고 나온 인물들인 걸 알 수 있다. 더불어 소설에서 작가는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마치 자신이 의견이 아닌 듯 피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넨 인간이라는 종이 이딴 식으로 살아가면서 앞으로 만년씩이나 지구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보나”(33p)라든지, “지난 오십 년간 인간에게 그 시대를 반성하는 역사가 있었나?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지. 자신의 아파트 평수나 지키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로.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증오해. 치욕스러워”(255p)라든지, “중요한 건 서로가 믿음을 가진다는 거죠.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믿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319p)라는 식으로 말이다.

작가는 현재의 인간, 혹은 현재의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통해 위와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성곤의 말처럼 환상은,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산출되고 결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의 심토머에 대한 환상은 현대인들의 병리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등장해야 할 새로운 인류에 대한 오마주(hommage)일지도 모를 일이다. ‘징후를 가진 사람들’로서의 심토머들이 이 땅의 소수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징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놓은 모양새라는 말이다.  


작가의 고백: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작가의 유쾌한 문장에 대해서도 간단히 집고 넘어가야겠다. 소설가 이승우는 “헛말을 심각한 어투로 태연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 작가의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문장”(365p)이라고 묘사했으며 소설가 전경린은 “감칠나게 말을 구사하는 재기”(366p)라고 표현했다. 유머러스한 문장 하면 떠오르는 근래의 작가들이 (성석제나 이해경, 박민규나 박현욱) 구사하는 문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이렇게 경고한다.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6p)

 작가의 이 말은 일찌감치 이 소설이 진지함과 정공법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가 취한 방법은 불경하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권력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미학의 역사에서 사장(死藏)되어버린 ‘웃음’의 방법론이다.

그것이 풍자이든 패러디이든 키취이든 상관없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의 후손들이며 인류 미학의 한 족보를 형성하는 축이다. 웃음은 권력과 지배서사와 거대담론에 맞서는 가장 유용하면서도 강력한 서사적 무기였으며, 백수와 한 끝 차이밖에 나지 않는 작가들에게 웃음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서사적 선택이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니 웃자. 읽으면서 웃으면 된다. 혹시 아는가. 작가의 기대처럼 “바야흐로 독자들은 [캐비닛]과 더불어 새로운 소설 종(種)의 탄생을 목도하는” 행운을 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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