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후손 역사 앞에 오만”
“박정희 후손 역사 앞에 오만”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11.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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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채무 떠 안기 싫으면 유산도 포기하라”
와이드 인터뷰-정운현 태터앤 미디어 대표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군관에 지원하면서 썼다는 혈서가 사실로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8일 ‘친일인명사전’ 공개를 앞두고 1939년 3월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공개한 것이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 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편지 등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 전 대통령 자료를 공개한 것은 박지만씨의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강하다.

▲ 정운현 대표
정운현 태터앤 미디어 대표는 “박정희의 후손들이 한민족의 역사 앞에 겸손하지 않고 오만하다”며 “근대 100년의 역사에서 제대로 과거청산을 했다면 그들도 역사를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후손들이 기득권을 모두 물려받았으면서도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은 모두 거부하고 있다”며 “빚을 떠안기 싫다면 유산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정 대표는 지난 3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초청으로 광주를 찾아 ‘친일파를 통해서 본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강연했다.

다음은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한 일문일답.

▲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을 빼달라고 ‘친일인명사전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 박지만씨는 박 전 대통령이 단순히 일제시대 군인이었다는 이유로 식민통치에 복무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의적이며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 용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2004년 3월 제정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 반민족 행위자 선정기준으로 ‘적극적 행위’를 들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 앞에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박 전 대통령의 후손들은 기득권을 모두 물려받았으면서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은 거부하고 있다. 빚을 떠안기 싫다면 유산도 포기해야 한다.

▲ 박씨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건가.

- 박 전 대통령은 1942년 8월 만주군관학교 예과 2년을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육사 본과에 진학했다. 군사과목을 가장 잘했고 존경하는 사람도 나폴레옹이었다. 대구 사범학교에 다닐 때도 교련을 가장 잘했다. 본과 2년을 마친 후 1944년 7월1일 소위로 임관했다가 해방을 앞둔 1945년 7월1일 중위로 진급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교사직을 던져버리고 만주에 가서 군인이 됐다. 측근의 회고에 따르면 큰 칼을 차고 싶어서 군대에 갔다는 것이다.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만주군관시절에는 문경 하숙집을 찾아와 마루에 칼을 꽂아 놓고 군수와 서장을 불러다 놓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교사시절 당했던 앙갚음을 위해서다. 생도의 위세가 그 정도였는데 일본군 장교가 단순한 군인이었겠는가.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국 용병이었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다. 일본군이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데려다 꼭두각시로 세우고 일제 앞잡이 노릇을 시켰다. 마치 만주군이 일본군과 다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국 황제 푸이의 이름이 새겨진 금시계도 받았다.

▲ 특별법상의 반민족행위자 선정기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가.

- 이 법은 지난 정권에서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제정과정에서 누더기로 변질돼 시행되기도 전에 개정안이 발의될 정도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지나치게 선정기준을 낮춰 잡거나 특정분야를 조사대상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특별법 제2조(정의)에 ‘친일반민족행위’를 규정하는 총 20개항의 조항이 있는데 법률적 용어로 부적절하거나 논란이 될 만한 문구가 많다. 이를 테면 주도적, 적극적, 현저히 등의 용어가 있는데 무엇이 적극적인지 계량화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견해를 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 친일파 청산을 못한 이유를 반민특위의 와해에서 찾고 있는데.

- 제헌헌법에 친일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에 따라 1948년 김웅진 의원이 민족반역자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만약 반민특위가 1949년 1월부터 1950년 8월15일까지 제대로 활동을 했다면 현대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9일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을 1호로 검거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과 군대 내의 친일파들을 거의 청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 6월6일 경찰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묵인 하에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반민특위 위원과 재판관, 검찰, 특경 대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이다.

이 때문에 김상덕 반민특위 초대위원장과 1기 위원들이 모두 사임했다. 한민당 출신 이인 법무장관이 2대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됐다. 반민특위가 조사한 총 682건 가운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단 1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반민족 행위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풀려났다. 반민특위 조사가 친일파들에게 역사의 면죄부를 준 것이다.

▲ 친일파 청산의 최대걸림돌은 무엇이었나.

- 미군정 3년이다. 미군정은 통치기간 동안 남조선과도입법위원가 제출한 친일파 청산법안을 처리하지 않았다.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우익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일제부역자들은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지방에서는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것이 해방된 조국의 민심이었고 그때 친일파를 청산했다면 깨끗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문에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고 역사적 자료가 소실되면서 친일파 청산 작업은 더욱 어려워졌다. 반면 북한은 1946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주도로 친일파를 청산했다.

▲ 정운현 태터앤미디어 대표가 지난 3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초청으로 광주를 찾아 '친일파를 통해서 본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친일파 청산작업이 지금까지 어려운 이유는.

- 반민특위 와해 이후 만주군 출신 박정희와 만주국 대동학원 출신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친일문제는 금기의 영역이 됐다.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 취급을 당했다.

역사학자이자 친일반민족 행위자 진상규명위원장을 맡았던 강만길 교수와 제자들조차도 친일파 논문을 단 한 차례도 쓰지 않았다. 진보적이고 용기 있게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학자들도 친일문제에는 둔감했다. 그만큼 친일파 문제는 두려운 주제였다.

1996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꿀 때 여론조사 결과 ‘그대로 쓰자’는 의견이 많았다. 국민학교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서다. 국민학교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약자다. 친일청산에 대한 거부감도 많다. 재미있는 것은 해방 직후나 지금이나 그 논리가 똑같다는 것이다.

친일청산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는 반증이다. 가장 흔한 논리는 경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과거사 청산이냐는 거다. 또 친일 청산을 말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도 똑같다. 다 지난 일을 지금 다시 꺼낼 필요가 있냐는 논리와 그때 학교 다니고 세금 냈으면 다 친일파라며 전 국민을 친일파로 만드는 논리도 판박이다.

▲ 친일파 가운데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 사람은 없었나.

- 친일파 4~5명과 후손 중에 참회하고 눈물로 반성한 사람도 있다. 민족대표 33인중 천도교 대표였던 최린이 대표적이다. 최린은 해방 후 제헌국회 반민특위 재판 법정진술에서 내가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지만 노쇠한 노모 때문에 국민적 신망과 의를 내버린 만큼 광화문 사거리서 나를 찢어 죽여 달라고 했다.

장면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했던 현석호는 일제 때 행정고시에 합격해 전남지역에서 군수를 했다. 그는 80세 때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통해 일제시대 경력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이항녕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관 시험에 합격해 1941년부터 4년 동안 군수를 하면서 나름대로 양심과 가책을 느꼈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 불렀지만 가지 않고 참회의 의미로 평교사를 했다. 이후 틈날 때마다 말과 글로 사죄했다. 그는 일제 때 5급 이상 고등관은 모두 친일파라고 했다.

파인 김동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단한 친일파였다. 하지만 일제말기에 완전히 돌아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자수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는데 아들 김영식이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했다. 

▲ 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사람도 있는데.

- 일본이 도로와 철도를 깔고 학교와 공장을 지어줘서 우리가 이 만큼 근대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일본 극우 사학자들의 주장을 일부 역사학자들이 추종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 때 모든 사회 인프라는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지까지 학교를 만든 것은 제대로 부려먹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온전하게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 일각에서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다. 해방직후 친일파를 70만 명 까지 보는 사람도 있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에는 5천명 안팎이 수록 됐다.

개인적으로 3만 명 정도는 수록해야하고 살아있다면 1만 명 정도는 처단을 쳐야 한다. 역사의 단호함을 보여줘야 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역사청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운현 태터앤미디어 대표는
경남 함양출신으로 2002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21년 동안 언론에 종사했다. 2005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겸임하는 등 친일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2008년 10월31일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로 재직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종용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현재는 인터넷 매체인 태터앤미디어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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