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싸한 향 일품…“조선 최고의 생강 납시오”
알싸한 향 일품…“조선 최고의 생강 납시오”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9.11.06 2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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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토종을 찾아서 ⑬나주 왕곡면 ‘전왕이 생강’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주목 특산품으로 진상 기록
토종 생강 효능 아는 이들 ‘왕곡면 생강’만 고집

“생강은 음식 맛을 살리는 귀한 알뿌리 채소가 아니냐. 김치에는 물론이고 한약을 달일 때에도 들어가야 하지. 그리고 과자를 만들 때나 술을 빚을 때에도 생강이 들어가야 그 맛이 한결 돋보이게 된단다.”

율곡 이이 선생이 제자들에게 늘 생강 같은 사람이 되라며 들려주던 말씀 중 한 구절이다.
   
생강은 다른 음식 맛을 높여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맛을 잃지 않는다. ‘약방의 감초’처럼 많이 넣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제 역할을 다하는 생강은 예로부터 그 쓰임새가 많았다.

생선 비린내나 고기의 노린내를 없애주고 특유의 흙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토하젓을 담글 때도 생강은 필수적이다.  각종 음식에 향신료로 사용된 것은 물론 생강차와 생강주를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소화를 돕고 식욕을 왕성하게 해주는 생강은 한방에서도 진귀한 약재로 취급됐다.

생강의 생약적 효능은 이미 2천 년 전 중국의서에 등장할 정도로 뛰어났다. 감기·독감이 유행하는 겨울철엔 발한·해열제로 익히 알려져 왔으며 위를 튼튼히 하고 멀미, 메스꺼움, 딸꾹질을 멈추는 작용도 한다. 특히 차·배 멀미를 멎게 하는 데는 시판되는 멀미약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로 알려진 생강이 우리나라에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문헌인「고려사」에는 현종 9년(서기 1018년) 왕의 하사품 목록에 생강이 들어있어 11세기 이전부터 재배된 걸로 보인다. 

충청남도 서산시,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이 전국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압도적이지만 워낙 쓰임새가 요긴해 남도 들판에서는 집집마다 텃밭에 빼놓지 않고 키우던 채소가 또 생강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주 왕곡면 일대에서 키우는 생강은 중국산을 비롯해 개량품종들이 ‘알아서 길을 내줄 만큼’ 그 존재감이 뚜렷하다.

이름하여 ‘전왕이 생강’. 오래 전 이곳 지명이 전왕면으로 불린데서 유래했다(전왕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왕면과 욱곡면을 합치면서 왕곡면으로 불렸다). 전왕이 생강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나주목의 특산품으로 당시에 일찌감치 조선 최고의 생강으로 인정받았던 것.

일제강점기에는 나주에 3개의 조합이 존재했는데 나주과물조합, 전왕면 생강조합, 나주죽물조합이 그것으로 나주배, 나주부채와 더불어 전왕이 생강의 명성이 자자했음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옛말 중에는 또 ‘맛은 나주 모양은 전주’라 일렀다. 그 말을 증명하듯 나주에서 나는 별미를 어팔진미(漁八珍味) , 소팔진미(蔬八珍味)로 꼽았는데 전왕이 생강은 향신료로는 드물게 16진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

▲ 강길식씨가 수확기를 앞둔 전왕이 생강을 들어 보이고 있다. 60여 년 동안 토종 생강만을 고집해 온 강씨는 “맛과 향기에서 다른 생강이 따라올 수 없다”며 전왕이 생강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명성 때문에 현재도 왕곡면 신가리, 장산리, 양산리 일대에는 집집마다 밭 한두 뙈기씩은 꼭 전왕이 생강을 재배한다. 다른 개량품종과 비교해 맛과 향이 탁월해 아는 이들은 가격이 조금 비싸도 꼭 왕곡면 토종 생강을 찾는다. 파종시기인 3월이 되면 종자를 구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크기는 좀 작아도 향이 진하고 맛이 강해 김치를 담글 때는 물론이고 생강강정, 한과에도 꼭 전왕이 생강을 넣어야 제격이지요. 예전부터 이곳 생강을 가지러 제주도에서도 오곤 했어요.”   60여년 동안 전왕이 생강을 재배해 온 강길식(77.왕곡면 신가리)씨의 말이다.

생강이 본래 볼품이 없긴 하지만 전왕이 생강은 개량종에 비해 색깔도 가무잡잡하고 크기도 작다. 그러나 진향 향과 맛에 있어서는 동종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탁월하다. 껍질을 벗겨 방안에 두면 집안의 모든 잡냄새를 없앨 분 아니라 승용차의 방향제로 사용할 정도로 향기가 진하다.

또 중국산이나 개량종은 질긴 힘줄이 들어있어 먹기가 불편한 반면 토종 생강은 ‘깡치’가 없고 껍질이 얇아 따로 벗겨낼 필요가 없어 선호도가 높다. 이처럼 맛과 효능이 뛰어난 탓에 나주의 또 다른 특산품인 배를 즙으로 가공할 때나 염소고 등 각종 고(膏)를 낼 때도 전왕이 생강이 빠지지 않는다.

한약방에서도 다른 생강을 쓰면 약효가 떨어지기 때문에 매운 맛이 강한 전왕이 생강만을 고집한다.
나주 시내에서 전남생강총판을 운영하는 송용봉(52)씨는 “신종플루 공포에 환절기를 맞아 나주 배즙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감기 예방에 좋다는 도라지, 수세미 등과 함께 나주생강이 꼭 들어간다”면서 “토종 생강의 맛과 효능을 아는 연세 드신 분들이나 한약방에서도 왕곡면 생강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주로 찾는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전왕이 생강은 타 지역 생강에 비해 높은 가격을 받는다. 요즘 시세로 일반 생강이 kg당 3천원 선인데 비해 전왕이 생강은 4천~5천원에 거래된다. 올해는 장마가 길어지면서 뿌리썩음병과 잎집무늬마름병, 파밤나방병 등이 심해져 전국적으로 생강작황이 좋지 않아 본격적인 김장철이 다가오면 가격이 지금보다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한때 전왕이 생강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인삼, 도라지와 마찬가지로 구근식물인 생강은 연작을 할 경우 수확량이 떨어지고 각종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뿌리가 썪는 ‘뿌리 썩음병(일명 탄저병)’이 번지면서 명맥이 끊길 처지에 놓인 것.

농민들은 그 때의 위기를 거울삼아 토종 생강을 재배할 때 친환경 퇴비로 땅심을 돋우는 일을 거르지 않는다. 또 충남, 전북의 규모에 밀려 대규모로 농사를 짓기보다 광주·전남 시장만을 겨냥한 탓에 밭이랑을 옮겨 심으면서 지금은 연작의 피해도 거의 없는 편이다.  

생강은 뿌리가 얼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조생·중생·만생종이 있지만 보통 10월 중순부터 첫눈이 내리는 11월 말까지가 수확기다. 전왕이 생강은 주로 마을 아주머니들이 직접 수확한 생강을 가지고 나주와 영암 인근 5일장과 송정오일시장, 양동시장 등을 돌며 직판을 하거나 광주 농수산물센터에 도매로 출하한다.

▲ 나주 왕곡면 생강 "진짜" - 송정오일시장에서 만난 반가운 이름.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왕곡면 생강. 크기는 작아도 개량종에 비해 맛과 향이 월등하다. 사진 오른쪽 색깔이 거무튀튀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이 왕곡면 생강, 맨 왼쪽 줄기가 길고 씨알이 굵은 것이 개량종.
시장을 둘러보기 위해 송정오일시장을 찾은 지난 28일, 채소전에는 왕곡면 생강보다 줄기가 길고 씨알이 굵은 개량종 생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박스 일부를 찢어 삐뚤빼뚤한 글씨로 ‘나주 왕곡면 생강 진짜’라고 써 붙이고 생강을 파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왕곡면 생강이 그렇게 좋답니까?”하고 물으니 아주머니 왈 “안 먹어봤으믄 말을 말어. 전국에서 젤로 좋은 생강이 바로 왕곡면 생강이여. 중국생강하고 비교를 마. 향기 좋지 맛 진하지, 한번 잡솨 봐”하신다.
작지만 매운 토종 ‘진왕이 생강’은 그렇게 민초들의 입으로 몸으로 핏속으로 면면이 그 명맥이 이어가고 있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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