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으로 가는 길을 묻다(桃園問津)
도원으로 가는 길을 묻다(桃園問津)
  • 범현이
  • 승인 2009.11.06 18: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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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화투로 풍속에 말을 거는 작가 정희승(47)

▲ 정희승 작가.
프롤로그

1980년대 중반, 대학 졸업반일 때 작가를 처음 불로동 화실에서 보았었다. 피부가 하얀 미소년에서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창밖으로 진눈깨비 내리는 것이 보인다. 올해의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진눈깨비다. 바람에 온몸을 떨고 있는 창밖의 나무들.. 갑자기 내려간 온도가 우리를 웅크리게 만든다. 싸늘한 기운을 몰고 바람이 작업실 안을 휭휭 돌아다닌다. 우리도 그 안에 바람으로 앉아 서로에게 몰두하며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간다.

늘 사는 것이 궁금했었다. 광주를 떠나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이곳에 남겨두고 기웃거렸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간과 공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일 때도 보이지 않은 색실을 따라 같이 움직였다.

작업은 일정속도로 진행되고 같은 선상에 있다. 넓은 작업실 안. 100호의 그림들이 벽의 이곳저곳에 진열되듯 걸려 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많은 이야기들도 더불어 흘러갔다. 그리고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아직 살아있다.

1980년대를 지나 2009년.. 다시 긴 터널에 들어서다

환상은 끝났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 다시 말하면 미술운동에 있어서의 일이다. 80년대를 지나 문민정부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급속도로 변했다. 비로소 이루어진 자유선진국이 되어 더 이상의 미술운동은 필요하지 않은 듯싶었다. 93년 이후로 미술운동이 표방했던 가시적인 전선은 눈에 보이도록 빠른 시간의 속도로 사라졌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가 발전적인 의미의 해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외향적으로 비대해진 미술은 일 년이면 수만 명의 미술대학 졸업생들을 배출했고 상업성 짙은 그림으로 문화계전반에서 공공미술과 함께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민족미술협의회’나 작가가 몸담았던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예전의 활발한 운동을 접고 문화라는 거대 담론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언제를 기약할 수는 없지만 같은 선상에서 각자의 작업을 목표로 하며 대중 앞에서 스스로를 접었다.

▲ 꽃시절1.
현재는 미술운동이 없다. 전반적인 현재의 사회문화의 움직임과 소외받고 있는 민중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하지도 않으며, 순간으로라도 말을 걸려하지 않는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그림, 잘 팔리는 그림, 누구나 소장하고 싶어 하는 감각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한다.

그 소수 중의 한 명이 작가이다. 그 소수들에게 들리는 말은 여전히 같은 색깔이다.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지. 이런 그림을 누가 사겠어? 하지만 내 눈에는 이런 소외들이 우리시대 풍속화로 보이는데 어쩌겠어요? 그런 시대를 거쳐 왔고, 눈을 가졌는데, 아름다운 꽃보다는 소외가 먼저 보이는데.. 팔려고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은데 어쩝니까.”작가는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텅 비어있다.

화투로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신풍속도

7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작가는 그동안 게을렀다고 말한다. 작업의 선명도가 익숙하다. 20여 점이 넘는 완성품 거의가 100호 이상의 대작이다. 300호에 이르는 것도 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작업을 하기 전 구상에서부터 내 머리 속은 이미 100호 이상으로 가닥을 잡아간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화투에서 1번으로 12번까지의 순번이 우리 12개월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화투’ 연작 기본은 일 년 열두 달 각 월마다 부여되는 화투의 숫자와 상징적 의미가 주조로 작업의 바탕이 되고 있다.

1월 ‘송학’ 20끗짜리 光에 일이라는 숫자와 최고를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인 타워팰리스를 그려 넣고, <바벨탑>이라 이름 붙였다.

▲ (왼쪽부터)바벨탑, 나비꿈, 세개의 별, 해거름.

뉴타운 분양 애드벌룬을 높이 띄운 <녹수청산>으로, 3월 ‘벚꽃’ 20끗 光은 불법비자금 문제로 시끄러웠던 대기업의 심벌 세 개와 그 사건과 관련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그려 넣어 <세 개의 별>이 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고급 외제차에 하루살이 대리운전 전단지를 끼워 넣어 <꽃시절>, 4월 ‘흑싸리’ 껍데기는 산과 들에 흔해 빠진 싸리처럼 특별한 존재성도 없는 사람들의 고단한 하루해가 저무는 해질 녘 풍경은 막걸리로 상징되어 <해거름>이 되고, 5월 ‘난초’ 10끗짜리는 살균·해충방제 효과가 있는 꽃창포를 해맑은 소녀와 함께 그려 넣고 <생명의 꽃>이 되었다.

▲ 생명의 꽃(좌), 영어완전정복.

또, 8월 ‘공산’ 20끗짜리에는 외제차와 허드레 목장갑을 위 아래로 그려 넣고 <부귀도-부자되세요>라고 기원하고, 굶주려 뼈만 앙상한 채 들판에 널브러진 아이 위로 허연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그릇을 금빛 보름달 가득 띄워 <공산토월 空山吐月>로, 같은 8월 연작이면서 10끗짜리 기러기에는 조기유학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과 거꾸로 쓴 영어들로 공백을 채워 <영어완전정복>, 9월 ‘국화’ 껍데기는 나비랑 함께 어차피 꿈일 수밖에 없는 대박당첨 로또를 그려 넣어 <호접몽 胡蝶夢>으로, 10월 울긋불긋 ‘단풍’ 껍데기에 관광버스를 그려 넣고 <묻지마>로, 세 개의 큰 캔버스를 연결시켜 구성한 11월 ‘비’ 껍데기는 이라크전쟁 포로들과 폭격기, 굶주린 아이들을 흑백으로 양쪽에 배치하고 중앙에 눈물 축축한 소녀의 얼굴을 극사실로 묘사하여 <생명의 물>이라 이름 붙였다.

▲ 호접몽1(좌),호접몽2.

▲ 생명의 물.

같은 길을 걸어 온 사람들. 여전히 같은 선상에 있는가

반어법이 많은 작가의 그림은 나름의 말 걸기에 성공한 듯 보인다. 지금껏 작가가 해 온 형식과는 다른 의미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결같다.

▲ 홍싸리(좌), 흑싸리.

정면으로 시선을 응시하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도 보인다. 그동안 같은 선상에서 작업했던 동지들이다. 조정태, 천찬욱, 임남진이다. 비록 흑싸리를 배경으로 서 있지만 각각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희망을 조건으로 현재의 풍속을 그려 넣고 있다. 대신 발원해주는 작가가 바라는, 그들의 희망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다. 힘든 작업 속, 한 번 발을 들이 민 세상에서 의지대로는 아니지만 꿋꿋하게 버팅기고 있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

바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으로 한창 자라나고 있는 아이를 그려 넣은 작품도 있다. 작가는 딸을 모델로 ‘생명의 물’, ‘생명의 꽃’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발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들은 거의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가장 대중적인 풍속들로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작품 안에는 가장 일반적인 우리네의 삶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 꽃시절2(위), 꽃시절3.
작가는 “지금껏 그려온 것은 리얼리즘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그림들을 주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민화를 좋아한다. 증폭되어가던 민화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일상 속에 풍속화처럼 자리 잡아 가장 대중적인 화투를 선택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기에 관계없이 가까이 하는 화투 속에서 풍속을 집어넣어 표현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다시 무엇인가를 찾아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맞이할 준비다. 자신의 색을 찾아 다시 긴 여행을 떠난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일시 : 11월12일(목)~11월25일(수)
장소 : 5.18기념문화관 1층 전시실
문의 : 011-9611-4270



에필로그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  詩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돌아서 나오는 길에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고 싶었다. 가장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걸어 온 길을 알기에 물을 수 없었다. 표현의 방법이 달라졌을 뿐, 작가는 적어도 예전 80년대의 작업 선상에 있어보였다. 언제까지 연속성을 지닐 수 있을까.

그리운 것들은 항상 어둡다.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니어서 벽마저 필요 없는 세상의 하루다. 그리운 것들이 푸르게 던져져 와서 가득 차버렸다. 몸 한군데 성한 곳 없이 푸른 멍이 들었다. 내가 없는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내 안에는 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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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1인 2009-11-06 22:39:38
그림도 좋지만 글이 더 맘에 드네요.
미술운동이 사라졌다에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