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439명 희생, 최종책임은 대통령과 국가”
“민간인 439명 희생, 최종책임은 대통령과 국가”
  • 장현준 기자
  • 승인 2009.10.2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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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순천지역만 2000여명 추정

▲ 지난 20일 순천합동제 위령제 모습. 이날 행사는 매년 진행된 위령제와 함께 진실규명고유제가 병행됐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월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과 관련 순천지역 민간인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 학살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48년 11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집단 학살을 초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군 제2·3·4·12·15연대 소속 군인들과 순천경찰서 경찰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경고문’에 과잉 충성, 민간인들을 상대로 무리한 진압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은 반군이 진압된 이후에도 반란 동조자 색출이란 이름하에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여순사건 진압 이후 정부군은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의 귀, 손가락, 목을 잘라 허위로 전과를 보고하거나, 반군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은 민간인의 일가족들을 사살하는 등 법적 기준이나 근거 없이 민간인 살해를 일삼았다.

희생자들은 반군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거나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 반군에 가담했다는 혐의, 무고와 모략 등의 이유로 희생됐으며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연행과 불법적인 취조·고문을 당했다.

당시 군·경은 민간인 살해 근거로 내세운 계엄령에 대해 법적 근거도 없이 계엄법이 공포됐다고 밝혔으며, 현지 지역 사령관은 자의적 판단아래 민간인을 반란동조자라는 혐의만으로 불법 연행해 살해했다. 계엄령 아래 군·경의 민간인 살해 방편이었던 ‘즉결처분권’에 대해서도 군인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집행했고, 일반적인 군율조차 따르지 않았다.

순천지역 희쟁자는 439명으로 확인됐으나,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거나 사건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2천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군경은 법적 기준이나 근거 없이 민간인 살해를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며 “계엄령을 인정하더라도 명백한 학살 행위”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는 “늦었지만 국가 기구가 나서 국민의 피해실태를 직접 조사해 대통령과 국가의 책임을 명백히 하고 국가의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다”고 일단 환영했다. 시민연대는 그러면서도 “사건 발생 60년 만에 이뤄진 진실규명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진실 규명 추가 신청 기회를 주고, 보도연맹 사건과 형무소재소자 피해사건 등 연관 사건의 종합적인 조사를 통해 통합 보고서 작성해야한다”고 요구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피해 규모가 시민연대가 지난 2006년 조사한 1111명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위와 같은 조사를 바탕으로 국가가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등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 지난 19일 여수합동제 위령제 모습.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여수지역 민간인 학살

진압군의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반군은 백운산과 벌교방면으로 이동해, 당시 여수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소수의 군인과 이 지역의 좌익 활동가들, 그리고 분위기를 따라 토벌군에 협력하고 있었던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의 작전은 반군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1948년 11월26일 진압군은 확성기를 통해 시민들을 여수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 길거리에는 골목마다 무장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서 이탈자를 감시했고, 줄에서 이탈하면 반란군으로 간주하여 발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진압군은 먼저 사건 가담자로 판단되면 즉결처분장에서 곧바로 총살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 경찰에 넘겨져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반군에 협력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우익인사·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고, 이들이 가르킨 단 한 번의 손가락질이 생사를 갈랐다.

협력자 색출의 후유증은 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계속해서 시민들을 괴롭혔다.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나 자세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색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지역 공동체 성원 간에 이루어진 ‘손가락 총’으로 공동체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이루어진 공포와 죽음 뒤에는 인간불신이 내면화됐다. 좌우익을 오가며 협력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장구통’이나 ‘양날백이’같은 말은 생존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혐오 또한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한국사회 반공체제 형성의 계기가 된 여순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60년은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순체제’ 60년이었다”며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여순사건을 알아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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