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광풍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광풍
  • 장현준 기자
  • 승인 2009.10.2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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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회, 19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위령제 열어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진실화해 위원회.

한국전쟁 전후로 광주전남지역에서는 ‘민간인학살’의 광풍이 불었다. 군·경에 의한, 인민군·빨치산에 의한, 이념에 따른 보복성 학살 등이 이뤄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9년이 지났지만,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동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발표한 내용은 사건의 일부분에 그친다.

지역에서는 지난 10월 5일 화순합동위령제를 시작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연달아 개최되고 있다. 지난 19일(여수합동위령제), 20일(순천합동위령제), 21일(해남합동위령제), 22일(완도합동위령제), 23일(구례합동위령제), 24일(태안합동위령제) 위령제가 열렸다. 오는 29일(담양합동위령제), 30일(광주합동위령제)에도 계획돼 있다. 위령제를 지냈거나 지낼 예정인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을 정리해 봤다.

화순, “점령세력에 따라 민간인들 번갈아 희생”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부터 화순지역에서는 민간인들이 북한 인민군과 국군·경찰 등 좌·우 세력에 의해 번갈아 가며 집단 학살당했다. 인민군 등에 의한 희생자가 143명, 국균 11사단에 의해 103명, 경찰에 의한 희생자 62명 등 민간인 학살 희생자는 모두 308명에 이른다. 좌우익 세력의 구분 없이 만삭의 임산부를 비롯해 젖먹이 유아와 노인, 장애인 등 지역주민들이 무차별적이고 잔인하게 살해됐으며, 일가족이 한꺼번에 희생되거나 집 안의 노인과 장애인들이 불에 타 죽는 등 전쟁의 잔혹성을 보여줬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화순 지역을 점령한 이후, 지방 좌익에 의해 1명의 행방불명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인민군 퇴각기인 9월 말에는 광주형무소와 화순내무서에 갇힌 12명의 경찰과 대한청년단원, 공직자 등이 정치보위부원과 자위대원, 인민군에 의해 화순저수지에서 희생됐다.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 사이에는 빨치산과 군경토벌대간 교전이 벌어지면서 군경에 협조했다거나 또는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295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0월 초에는 빨치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10살 미만의 어린이와 여성 등 일가족 19명이 희생되었으며, 경찰의 지시로 전선·전주를 지키던 주민들도 살해됐다.

10월 중순부터는 경찰에 의한 희생자가 생겨났다.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지서가 피습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 10여 명이 본보기로 사살됐다. 또 야간에 빨치산에 의해 전주가 잘렸다는 이유로 경비를 맡은 주민을 경찰이 사살하기도 했다.

해남, “우익단체에 의해 민간인 학살”

해남지역은 경찰과 경찰의 지휘·명령·감독 아래 있던 의용경찰, 의용소방대, 그리고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좌익활동이나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산이면 주산동 뻔지, 마산면 노하리 붉은데기 등 해남군 13개 읍·면지역에서 비무장 주민들을 사살했다.

1946년 11월 해남추수봉기사건 이후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월신마을에서는 봉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년에 걸쳐 마을 주민 10여 명이 경찰에 희생됐으며,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에서는 추수봉기 가담자 및 좌익활동 혐의자 다수가 살해됐다.

1950년 10월 경찰은 대한청년단, 의용소방대와 함께 산이면 상공리 수복을 위해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하던 중 이를 피해 부동리로 피신한 마을주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주민 4~5명이 사살됐다.

1950년 11월 7일에는 마산면에서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 20여 명이 마산면 화내리 두드럭재에서 희생되고 1951년 3월14일 부역혐의를 받은 산이면 주민 24~28명은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됐다.

완도, “구도 섬인구의 70% 학살당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남쪽으로 후퇴한 나주부대가 완도경찰과 지역 인사들의 밀고로 230여 명의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횡간도 49명, 당사도 5명, 구도 26명, 노화도 60명, 보길도 10명, 신지도 60명 등 주민 230여 명이 살해됐다. 구도의 경우 당시 전체 가구가 20여 가구임을 감안하면, 26명의 집단학살은 마을전체 인구의 상당 수에 해당된다.

1950년 7월말 인민군의 대공세에 밀려 나주부대는 완도까지 퇴각했고 완도에 도착하자 완도중학교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완도읍에서 청산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소안, 횡간, 신지, 노화, 보길도 주민들을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학살하기도 했다.

구례, “군·경, 반군 진압작전 중 민간인들 ‘즉결처분’”

여수순천 사건 당시 구례군 일대에서도 국군과 경찰이 반군 진압작전을 수행하면서 그 지역의 다수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남자(96%)였으며 그 중 20·30대가 118명(72%)이었고, 구례군 산동면과 간전면에서만 91명(55%)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들은 토벌 작전지역에 거주했거나 남로당 등 좌익단체에 가입한 혐의였고, 일부는 반군에 식량을 제공했다는 등 혐의를 받았으며 좌익이나 입산자 가족, 동료라는 이유만으로 대신 살해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군·경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과 비인도적 취재와 고문, 좌익단체 가입 여부에 대한 확인 절차 없이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를 거친 후 살해했다.

군·경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작전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내세워 ‘즉결처분’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많은 민간인들이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담양, “빨치산의 유격활동과 군·경의 토벌작전 반복으로 희생자 발생”

담양·장성군 일대에서는 최소 57명 이상의 주민들이 통비분자,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전남경찰국 기동대, 담양·장성경찰서 특공대 및 의용경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민간인들로 당시 경찰은 여성과 노인을 비롯해 어린이들까지 살해하는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담양·장성지역은 노령산맥을 축으로 지리산과 연계돼 있어 빨치산의 유격활동과 군·경의 토벌작전이 자주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교전지역 인근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담양·장성지역이 수복을 앞둔 1950년 12월부터 경찰특공대 및 토벌대원들은 부역자 색출 및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민간인들을 부역혐의자와 통비분자로 몰아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했다.

광주, “관내 이장, 반장 회의 소집 후 살해”

1942년 2월부터 1951년 10월 사이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대에서는 광산경찰서·광주경찰서 소속 경찰이 다수의 민간인들을 빨치산,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아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을 자행했다.

빨치산 이동경로에 인접한 광산군 삼도면·본량면 지역은 경찰의 공비토벌과정에서 ‘빨치산 협조자’라는 이유로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한 광산군 평동면, 효지면, 대촌면 등 광주시내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려 주민들이 희생됐다.

경찰은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붙잡아 빨치산의 위치를 취조하던 중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이 허위로 드러나자 사실과 다르다며 사살하기도 했다. 또 관내 이장, 반장 등 마을 유지들을 회의 소집 차 지서로 출두시킨 뒤 ‘부역혐의자’로 몰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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