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에 섰던 사람들,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경계던가
선(線)에 섰던 사람들,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경계던가
  • 노해경 기자
  • 승인 2009.10.12 12: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립에서 공존으로 ③DMZ의 사람

▲ ‘꺽지’가 됐다는 임꺽정의 전설이 살아있는 철원군 한탄강변의 고석정. 계급사회인 조선시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도적이 됐고, 당시 의적으로 불렸던 그는 현재 고석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의인’으로 통한다.
#7. 도적(盜賊)이 의인(義人)이 된 까닭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변의 고석정(孤石亭). 성호 이익이 홍길동·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3대 도둑으로 꼽았던 임꺽정의 근거지다. 정자 건너편 산에 석성(石城)을 쌓고 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탈취하는 등 몇 년간 정부의 골머리를 썩게 했다.

▲ 고석정 주변 음식점 ‘임꺽정가든’엔 의인의 초상이 걸려있다. 험상궂지만 가게 주인에겐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일 터. 적(賊)을 인(人)으로 붙여놓은 센스가 앙증맞다.
16세기 명종 시절. 잇단 흉년으로 민심은 흉흉했고, 정치는 백성을 살피지 않았다. 문무를 겸비했지만 천인이라는 신분의 벽에 막혀 탄식하던 임꺽정은 혼란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무리를 규합, 강원도를 넘어 황해도·경기도·한양까지 진출했다. 위정자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재편하고,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것에 힘쓰던 때 임꺽정과 그 무리들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살피며 민심을 얻었다. 

신출귀몰하던 임꺽정은 1562년 체포돼 처형됐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꺽정이 꺽지로 변신해 한탄강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탄생했다. 본래 임거정이었던 이름을 그 이후로 임꺽정으로 부르게 됐다는 각색까지 곁들였다.  

과거의 민심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일까. 고석정 주변에서 그는 의적이 아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는 의인(義人)이다.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고석정을 찾아 지역경제에 적잖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임꺽정가든’이란 음식점에 걸린 그림에서 죽은 도둑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호구까지 책임지고 있는 현실을 본다. 다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품었던 임꺽정의 현실이 현재와 교차하며 마음 한구석에 여운이 감돌 뿐. 

#8. 반쪽 왼 어깨로 남은 단편소설의 완성자

내 고향은 / 철원도 아니요 / 배기미도 아니요 / 서울도 아니다 / 부산부두에 / 발을 올려걷는 / 때부터 / 내 고향이다 (단편 ‘고향에서’ 中)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 200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는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그의 문학비와 흉상을 세웠다. 언뜻 보기에도 그의 흉상은 심상치가 않다. 자세히 살피니 오른쪽 어깨는 정확히 한 뼘, 왼쪽은 반 뼘이다. 월북작가인 선생에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상허 이태준. 그의 흉상 왼쪽 어깨는 반 뼘이다. 월북작가로 남에서는 ‘빨갱이’로, 북에서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보는 듯하다.
궁금한 방문객들을 위해 함광복 (사)한국DMZ연구소 소장이 나섰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했지만 1955년 무렵 북의 권력재편 과정을 통해 북의 권력에서도 소외돼 1969년 이후로는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된 상허 선생.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정당한 평가는 고사하고 남에서는 ‘빨갱이’로, 북에서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혔다. 굴곡의 삶을 살다 현재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일생을 평범한 흉상으로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흉상을 제작했던 강원대 최오경 교수도 이런 선생의 모습을 담기위해 고민을 거듭하다 이렇듯 사연을 물을 수밖에 없는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함 소장은 최 교수가 ‘좌우사이에서 고민하는 선생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흉상 제작 후기를 발표했다고 전했다.   

사연을 알고 나자 흉상 옆 문학비에 새겨진 단편 ‘고향에서’가 더 뼈저리다. 자신이 현재 서있는 곳을 고향 삼아야하는 경계인의 고독과 처량함이 묻어난다. 밭으로 변한 철원군 묘장면의 선생 생가 터도 을씨년스럽긴 마찬가지.

장소를 알리는 이정표마저 밭둑에 삐딱하게 기울어 있다. 밭주인은 자신의 소유지가 ‘빨갱이’ 작가의 집터여서 불만이었는지, 선생을 기린다며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낯선 이들의 방문에 심통이 났는지 곧 쓰러져가는 구조물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9. 그리고 함광복

그리고 함광복 (사)한국DMZ연구소 소장. 지난 30년간 그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남긴 경계, DMZ의 한 가운데를 헤집고 다녔다. 강원일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함 소장이 DMZ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양구 펀치볼에서 발생한 민통선 토지분쟁 사건을 취재하면서부터다. 한 세대의 정열을 고스란히 DMZ에 쏟고도 아직 함 소장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 세월동안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늘어서 있던 DMZ의 사실들은 그의 발품에 상상력이 가미되며 씨실과 날실의 격을 갖추게 됐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놓은 현실의 경계의 안팎을 살피며 이야기를 발굴하고 살을 붙이고 서사를 만들어온 세월이었다.

▲ 함광복 (사)한국DMZ연구소 소장. 그의 지난30년이 있었기에 DMZ라는 현대사의 경계는 대결을 넘어선 평화와 공존의 장이 될 수 있었다.
안보의 잣대로만 금단의 땅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비로소 우리 삶의 한 자락으로 DMZ를 바라보게 된 것도 모두 함 소장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DMZ는 우리가 살피고, 껴안아야할 온전하고 살가운 우리의 땅이 됐다.

경계를 살피던 그가 이제 경계를 등지고 우리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DMZ 곳곳을 누비며 그는 춤추는 혀를 통해 사람들에게 경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호소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아니 우리들은 그동안 DMZ를 너무 모르고 살았다. 대결만 떠오르는 그곳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을 설명하는 단어는 대결만이 아니었다. 무수한 생명도, 생에 열심인 사람들도 모두 평화와 공존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함 소장과 함께한 3박4일의 강행군은 어쩌면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인 대결의 공간으로 치부되는 곳에서 평화와 공존의 절박함을 몸소 깨닫는 만행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끝> 

*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의 취재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