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새의 노래
검은 새의 노래
  • 박정복 시민기자
  • 승인 2009.10.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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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응꼬시/ 창비

▲ <검은새의 노래> 책 표지.
말 자체가 어려워서 읽는 데 오래 걸린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지만, 나의 무의식까지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책에 몰입할 수 없는 이유가 흑인과의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소설이 반 인종차별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반 여성평등적이라는 수식은 어떨까. 이 소설에서 여자가 대상화되고 있다면, 그래서 몰입하는 데 장애를 주고 있다면, 읽는 자의 시각이 너무 편협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한 흑인 청년이 있다. 그가 지켜보는 한 여자가 있다. 소설에서는 그녀를 소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별로 소녀다운 구석이라고는 없다. 소녀라고 명명하기엔 너무 여성스럽고, 요염하기까지한 여자에게 소녀라는 명명은 낯설기 그지없다. 이것도 선입견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인 바에야, 굳이 소녀라는 보통명사에 어떤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저 살갗이 하얀 소녀도 있고, 누런 소녀도 있고, 검은 소녀가 있을 뿐이다. 검은 대륙에서 태어나 철저하게 인종차별적 정부에 의해 소외되고 무시당한 한 흑인 청년의 가슴에 이상화된 한 백인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자신을 유혹한 것이라고 시종일관 말하고 독백하는 흑인 청년의 처지가 궁색하다. 그 궁색함이 교수형이라는 형으로 등가될 수는 없다. 소설은 1인칭으로 초점화하고 있기 때문에 백인 소녀의 입장이나 목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다. 그러니 흑인 청년의 목소리와 그의 주장에 독자는 실려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간이 뒤프레란 범죄심리학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백인 여자 심리의 미묘한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보다는 철저하게 학자적인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목소리에 집중한다. 그리고 실상 이 소설은 여성에겐 별 관심이 없다. 피부 색깔에 대한 자의식을 거름 없이 내비치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내면깊이에서 뽑은 말들로 엮어간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고, 한 남자는 여인에게 관심이 있고, 여인도 그의 시선을 싫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정상적인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제는 그것이다. 사회시스템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감정교류를 막는다는 것이다. 하나는 지배자의 것으로 하나는 피지배자의 것으로 계급을 나누어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흑인 사내가 백인 여자를 건드렸다는 이유하나로 기소되고, 교수형을 선고하는 나라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를 저지른 자의 내면에서 비롯된 부조리에 대한 저항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밖,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주인공은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범죄심리학자인 뒤프레의 물음에 주인공은 엇나가려하고, 농담을 건네려한다. 그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회. 남녀 간의 욕망 따위로 축소될 수 없는 흑백의 문제를 개인의 언어로 말하려한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아닌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백인이라서 우월할 것도, 흑인이라서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겸허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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