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외치는 오래된 미래들
평화 외치는 오래된 미래들
  • 노해경 기자
  • 승인 2009.10.09 2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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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에서 공존으로② DMZ의 건물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남북대결의 역사를 상징하면서도 평화의 상징도 담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한반도의 자연의 보고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시민의소리>는 ①DMZ의 자연 ②DMZ의 건물 ③DMZ의 사람 등 세 차례에 걸쳐 비무장지대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남·북이 반씩 만들었다는 합작다리. 이승만과 김일성 이름 가운데 자를 따서 이름도 승일교. 하나의 가설일 뿐인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적인 이유는 뭘까. 대립을 넘어 공존과 상생의 길을 함께 가야할 미래 당위를 웅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노해경

# 푸른 DMZ 속의 이어도, 궁예도성(都城)

▲ ⓒ 노해경
▲ 궁예도성지도와 철원전망대. 통일제국을 꿈꾸던 후삼국시대 궁예. 그 뜻을 구체화하기 위해 건설했던 도성이 DMZ의 푸름 속에서 아득하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으로 갈려있는 궁예의 옛 도성은 분단된 우리 현실을 상징하듯 아프게 다가온다. ⓒ 노해경
DMZ 내에 성(城)이 있다. 1,100년 긴긴 세월 존재해왔으면서 신기루처럼, 이어도처럼 쉽게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 성.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11시 방향. 눈에 힘을 주고 그쪽을 주시해 보지만 푸름만 무성할 뿐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인공구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토성이지만 일부는 용암대지인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이 섞여있는 토석 혼축성. 2001년 UN군사령부 정전위원회로부터 DMZ 출입허가를 받은 일단의 사람들은 1.8km 왕궁성, 7.7km 내성, 12.5km 외성으로 된 삼중성인 궁예도성을 확인했다. 해방 당시 있었던 궁궐터·석등(당시 국보118호)·남대문지·석탑·돌거북·귀부 등은 찾을 길 없었지만 지난 50년간 이름으로만 전해오던 궁예도성은 그 위용을 우리 앞에 드러냈다.   

반쪽짜리 통일국가 신라 말, 후삼국시대. 궁예는 나라이름을 태봉이라 짓고, 반도의 한 가운데 도성을 지었다. 그리고 자주·개혁의 깃발을 앞세우며 통일제국 건설을 꿈꿨다. 미륵을 자처한 궁예는 그 이상향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통일제국을 제시했다. 궁예 자신은 그 이상향을 끝내 볼 수 없었지만, 그 꿈이 있었기에 반도의 통일왕조 고려는 탄생할 수 있었다. 

도성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 궁예의 못다 이룬 꿈과 분단된 남북 현실이 오버랩 된다. 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음은 역사의 교훈일 터. 남북이 힘을 합쳐 궁예도성의 조사 및 연구를 추진하는 것으로 그 출발을 삼아도 좋을 듯했다.  

# 가시면류관 썼던 북의 노동당사

▲ 노동당사. 남쪽에 남은 북의 유일한 건물이자, 파괴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노동당사는 이제 ‘귀하신’ 몸이 됐다. 공존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곳을 평화의 메카로 변모시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짝퉁까지 생겨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 노해경
남쪽에 남아있는 유일한 북의 건축유적. 정면 34계단에 탱크가 밀고 올라간 캐터필러 자국이 고스란한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 30년간 건물 중앙에 ‘이 건물은 6.25 전 북괴노동당 철원 군당으로 국민을 착취하던 곳이었음’이란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었던 건물.

해방 후 북에서 건립하고 한국전쟁 전까지 북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쓰이던 노동당사 건물은 반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서 생산된 모든 증오를 한 몸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격세지감이라고 했던가. 요즘은 앙상하게 남은 이 건축물이 ‘귀하신’ 대접을 받는다.

한반도기로 가득한 미술전시관이 되는가 싶더니,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군악대가 와서 공연하고, 세계NGO 활동가들이 모여 평화선언하고, 한 쌍의 신랑 신부에게 자신의 골격을 웨딩포토의 배경으로 헌납하기도 한다. 이런 세태의 백미는 ‘짝퉁 노동당사’. 철원군의 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이 생활할 마을회관 모습으로 기꺼이 노동당사를 복제하기에 이르렀다.   

파괴·증오의 대상이자, 전쟁의 상징이었던 건물이 어느덧 평화·생산·공존의 장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까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건물의 안내문 뿐. 노동당사는 지난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 남북합작이 낳은 다리, 승일교

▲ 아래쪽은 북에서, 위쪽은 남에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오랜 시절의 생채기인지, 건축 초기부터 구분한 선인지 알 수 없지만 양쪽에 고루 몸을 실어보는 방문객의 행위는 이미 그 경계를 허물고 있다. ⓒ 노해경
남북이 합작해서 만든 다리. 그 이름도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承日橋). 분단의 현장 DMZ에 그런 다리가 있다니 깜짝 놀랐다. 그것도 한국전쟁을 전에 북에서 착공해 전쟁 후 남에서 완성했다니 꿈만 같을 수밖에.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와 동송읍 장흥리를 잇는 승일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 구주 공전 출신으로 철원농업전문학교 교사인 김명여가 ‘한탄교’란 이름으로 처음 다리를 설계했다. 북 정권하인 1948년 8월부터 장흥리 쪽으로부터 공사를 시작해 다리 절반 정도를 건설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중단, 이후 남쪽 관할이 되자 기존 다리와는 다른 공법으로 남측에서 나머지 구간 공사를 마무리하고 1958년 준공하면서 ‘승일교’라 명명했다는 것.

이외에도 다리의 건설과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한다. 대표적으로 특정인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남·북이 반반씩 공을 들였다는 말이 더 솔깃한 것은 DMZ라는 특수한 장소적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정을 평화·공존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는 방문객의 그릇된 편견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승일교 옆에는 1999년에 건립된 오렌지 빛 한탄대교가 있다. 두 곳을 이으며 교통수단의 역할에 충실한 이 철제 교량보다, 사람을 잇는 기능은 상실했지만 역사와 협력을 웅변하고 있는 돌다리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승일교는 2002년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의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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