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상 밖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 범현이
  • 승인 2009.10.09 21:2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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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거쳐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민중미술가 전정호(49)

▲ 전정호 작가.
프롤로그

추석 전, 작업실에서 한번 작가를 보았다. 늦깎이 전시회 도록에 실릴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동안 얼굴도 안 보이더니 어떻게 살았는지 소소한 근황들도 묻고 싶었다.

80년대. 작가를 제외하면 광주의 민중미술은 생각할 수 없는데 2009년인 지금,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는 10여 년의 시간동안 어떻게 그림이 변화했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바빴고, 생애 처음 전시하는 마음같은 비장함이 알게 모르게 내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작가를 만나러 간다. 유동 YWCA 근처다. 7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동네의 한가운데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형 건물 뒤, 건물로 가림막이 되었을 뿐, 소외는 여전히 존재한다.

작가는 일부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 아이들과 함께 미술교육을 하려는 목적이었다. 동네 어디서나 마주치는 간판은 차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차 도색, 판금 등등. 아이들이 뛰어놀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아니, 아이들이 없다.

▲ <일월오행악행도(대운하)>

작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정말 소질 있는 아이들을 걸러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흘러 흘러서 다시 강을 이루다

▲ <촛불-작음에서 큰 빛으로>
넓고 천장이 높은 작업실이다. 너무 깨끗해 신발을 신어야 할 지, 벗어야할 지 잠시 망설인다. 차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친밀감이 더한다. 전시회를 앞두고 한창 작업 중이었을 작가에게 작업을 정지하게 한 미안함이 목소리를 크게 만든다.

“군 제대 후 복학을 해 홍성담과 이상호를 만났다”로 작가는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대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민중 속으로>다.

“70년대, 서울에서는 이미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단체가 결성 되었고 한 목소리로 미술인들이 응집하고 있었다. 우리도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민중미술이란 단어는 정치적 용어 속에서 만들어졌다. 반독재 투쟁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몫을 찾아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작가가 있는 곳은 언제나 길 위였다. 함성이 있었고 걸개, 프랜카드, 벽보, 판화가 함께했다. 미술인의 목소리가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어디에서나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표현되었고 민중미술은 바로 문화 운동의 정점에 있었다. 가장 큰 가시적인 성과는 이 지역의 전대, 조대, 목대, 호대를 결합한 전남미술패연합의 운동이었다.

▲ 왼쪽부터 <부를 위해 민을 버렸다>, <눈2>, <전경과 어머니>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면서, 발전적인 해체를 했던 광주미술운동공동체에 대해서는 할 말도, 안타까운 마음도 많다. “90년대 들어 우리는 스스로의 작가 매너리즘에 빠졌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치열한 눈빛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사회를 좀 더 깊이 생각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했다. DJ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든, 참여정부가 들어서든 사회 어디서나 소외된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민중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하게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현재의 고여 있는 의식의 흐름을 낳았다. 생각해보면 다시 시작해야하는 미술 운동이었지만 넓게 생각하면 결국 시작에서부터 인식을 놓치고 방관한 결과를 초래했다.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한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나를 돌아보고 다시 결집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 <촛불-작음에서 큰 빛으로>
이제 우리가 세상 밖을 볼 때이다

이번 작가의 전시의 주제는 지역을 벗어나 세계로 향하는 소외된 민중들을 향한 이름 없는 폭력에 대한 대항이다. 단지 보여 지는 기아나, 전쟁만이 아닌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한 인권에 대한 물음표이다. 아프리카 시리즈, 촛불, 대운하에 대한 작가의 울림이 망라된 작업이 주조다.

“시작이 민중미술이었고 앞으로 그려가야 할 작업 역시 지금 보여 지는 그림 그대로이다. 사실은 일 년에 한번 정도의 전시회를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늘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전시를 꿈꾸었다. 작가에게 전시는 자신의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고백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3년 전 지금의 이 자리로 작업실을 옮겨오면서 생각하고 작업한 것이 이번 전시를 있게 했다”

작가의 그림은 은유가 없다.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하며 소통하는데 익숙하다. 굳이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림을 보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지 알 수 있다. 눈물이 핑 돌도록 강렬한 이미지이지만 중간 중간 서정적인 감성도 빠트리지 않고 잘 버무려두고 있다.

그림 안에는 눈물이 많다. 그림 속,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며, 혹은 머릿속 데생을 하며 작가는 울고 있다. 그 눈물작가의 손을 통해 그림 속, 눈물이 된다.

▲ <아프리카의 꿈1>

“사실은 눈물이 더 많았다. 문득, 그림에 눈물이 많은 것이 눈에 띄었고 관객의 몫이어야 할 감성까지 내가 먼저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다시 지우는 작업을 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꺾인 장미도 보인다. “천연자원 풍부한 아프리카가 서방세계의 수탈과 민족 간의 분쟁, 거기다 기아와 가뭄, 성폭행과 매춘까지 겹쳐 아직 채 피지 못하고 꺾여버린 아프리카 소녀들의 마음을 담았다.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지 못하는 아픔이다”고 말한다.

▲ 왼쪽부터 <아프리카의 꿈2>, <아프리카의 꿈2>, <절망>

작가에게 무심히 그림이 어떤 의미이냐는 우문을 던진다. 팽팽한 대답이 돌아온다. “호흡을 하고 살 수 있는 생명이다. 그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답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너무나 고마워 할 뿐이다. 더구나 풍경과 그림을 그리지 않게 해주어서 더 감사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대를 겪게 해주고 내 작업이 삶에 고발과 상징, 희망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 <나는 불가운데 눕고>, <나는 불가운데 눕고>

일시 : 11월 5일(목)~11월 11일(수)까지
장소 : 대동갤러리
문의 : 016-615-2311


에필로그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詩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따금, 정말 간절하게 세상을 향해 묻고 싶어진다.

불쑥 돋아나 손에, 팔목에, 다리에 칭칭 감기는 것들. 온 몸이 조각난 채 기억 속에서 불로 일렁이는 것들. 열정마저 열꽃으로 홍시처럼 불타올랐던 날들. 시간.

너무나 많은 이면지를 가지고 있는 삶의 시간들에게 묻고 싶다. 뿌리는 내렸지만 몇 번을 거듭 살아도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는 수생식물이 아닌, 흙 속에 견고한 뿌리를 이 나이가 되면 내려도 되는지.

내가 보고 있다. 너무 많이 변하여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는 나에게. 시간을 겹겹이 처바르고 껴입어 이제는 전혀 다른 인간인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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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 2009-10-10 20:35:12
대학 때 얼굴보고 처음이다... 너무 반갑다.. 무지 열심으로 살았는데.. 전시회 기억해 두었다가 꼭 찾아간다..그때만나자.뜨거운 악수 하자... 기자님. 그리운 친구 찾아주어서 감사합니다. 놀랍습니다. 탐정을 해도 되겠습니다. 어디서 이런 연락두절인 인간들을 잘도 찾아내는지...거듭 감사합니다..

궁금했었습니다.. 2009-10-10 14:34:58
이상호.정정호..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지요. 80~90년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이름이었으니까요..살아오는 동안 잊혀지지 않고 기억을 하게 만든 이름들이기도 하구요..소식을 알려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살아있어서 고맙습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