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부인, 황금박쥐를 만나다
애마부인, 황금박쥐를 만나다
  • 김영삼 시민기자
  • 승인 2009.09.16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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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집, 『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 <마징가 계보학> 책 표지 사진.
시집에 실린 작품들의 제목은 숫제 80년대 대중문화 목록을 옮겨놓은 것 같다. 당시 좋아했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일주일치 방송편성표를 짰다면 아마 이와 비슷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어릴 적 아버지 몰래 훔쳐보던 [선데이 서울]도 있다. (실상 지금 알려진 것처럼 야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버지의 무릎 아래 배를 깔고 누워서 읽기도 했고, 급기야는 딱지로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의 아랫도리를 후들거리게도 했다. 자식들!) 그래서인지 시인은 아예 [80년대 약전]이라는 과감한 제목을 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집의 제목인 『마징가 계보학』이라는 언뜻 어려운 제목에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대중문화들의 역사를 시적으로 정리해 놓았다라는 작가의 말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일단 작품들의 제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마징가 계보학][애마부인 약사][요괴인간][미키마우스와 함께][투명인간][가위손][스파이더맨][드래곤][드라큘라][독수리오형제][슈퍼맨][배트맨][아톰][원더우먼과 악당들][불한당들의 세계사][괴수대백과사전][돌아온 외팔이][황금박쥐].

여기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한 번 읽어들 보시라. 거기 우리들의 추억이 오롯이 잠들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거기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서사의 옷을 입고 적혀 있다. 때론 아프고 때론 슬프다. 웃음 뒤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아련한 추억들이 서러운 감정들을 물들이고 있다. 잠깐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다.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 [애마부인 약사(略史)] 중에서 -

이렇게 지난 시간을 미소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주인집 작은형은 스물일곱에 죽었다 / 스물일곱 해를 골방에서 살았다 /볕을 쬐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형이 몸을 흔들면 머리카락과 피부딱지가 / 우수수, 쏟아지곤 했다
(중략)
집안에 내려앉은 먼지는 대개 / 사람의 죽은 피부조각이다 / 형은 드디어 대낮에도 / 안방과 건넌방과 마당을 출입할 수 있게 / 되었던 것이다.   - [투명인간 1] 중에서 -

처럼, 그 추억 속에는 감추고 싶은 우리의 아픈 유년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조금은 유치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당시의 대중문화들은 분명 그 당시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때문에 우리가 보내는 조소는 지난 시간을 살았던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어구 하나 문장 하나마다 철저한 지성이 투과되어, 서술되는 기억들은 그 참혹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거의 투명하다. 말의 탄력은 기억을 준동케 하는 힘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운동을 제한하는 고삐가 되기도 한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잊어버리기 않기 위해서 들추어지고 조직되는 기억의 말들은 이 두 가지 목표에 닿기 위해 단 한순간도 논리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분산시키고, 과정을 생략하고, 순서를 전도하고, 관계를 도치하고, 서술 위에 서술을 중첩하고, 의외의 자리에 의미의 지뢰를 매설하고, 어조의 흥취를 타고 딴청을 부리고, 연결이 불가능한 연상을 타고 탈주한다. 이에 비견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다면, 꿈의 초현실을 현실의 논리로 서술하는 언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바로 시의 언어이기도 하다).

논리는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믿을 것이 아니다. 권혁웅의 계보학은, 또는 그 기억술은 논리로 제압된 몽환이며, 몽환으로 해체되는 논리다. 논리가 아닌 서사와 슬픔으로 채색된 논리적 기억의 과정이다. 상처의 기억을 포함한 모든 기억은 지하세계에서 구해온 여자처럼 뒤돌아 볼 때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이 시이다. 권혁웅이 작성한 기억의 계보학은 그래서 유쾌하고 비통하고 아름답다. 그 기억의 서사 한 조각을 여기 옮긴다.

박기수씨는 삐쩍 마른 사내, 몇 가닥 / 굵은 혈관이 지나다니는 / 수천 황인종의 표준형 두개골을 가진 사내 /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 굵은 뼈 위에는 튼실한 근육을 덧붙인 사내
빛나는 해골에 빤스 하나 걸치고 / 우리가 골목을 쏘다니면 노래를 부를 때마다 / 빤쓰 차림으로 달려나오던 사내 / 간염일 때 노동판을 그만두고 / 간경변일 때 아내가 떠나고 / 간암일 때 아이까지 뺏긴 사내 / 복수(復水)가 차올라 퉁퉁 불은 몸으로 / 어디, 어디, 어디에서 신출귀몰 / 목격되던 사내
그렇게 동네를 백수광부처럼 떠다니다가 / 어느 겨울, 그예 흰 머리 풀고 / 누더기를 망토처럼 덮어쓴 채 /  꽁꽁 언 요단강을 건너간 사내               - [황금박쥐] 전문 -

여기 박기수라는 이름은 무한 복수(複數)다. 하얀 런닝구에 파자마 차림으로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배 나온 아저씨가 배어있고, 언젠가부터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 사라져버린 듯이 보이지 않는 ‘거리 부랑자’의 모습을 거쳐, 가난과 불행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죽어갔던 ‘난쟁이’같은 사람들까지.

한때 한국사회에서 유행처럼 부정되었던 우리의 불쌍한 아비들의 모습들이 여기 박기수라는 이름에 모두 들어있다. 과거란 언제나 현재를 돌아보는 거울이라는 역사학의 흔한 명제가 권혁웅의 시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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