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집
내 영혼의 집
  • 범현이
  • 승인 2009.08.28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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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童話)에 동화(同化) 되어가는 작가 이현정(34)

 

▲ 이현정 작가.
취재요청 전화를 걸었을 때 작가는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 약속을 할 때는 내가 지리산 여행 중이었다. 날짜를 정하고 작업실을 찾아간 시간. 그녀는 없었다. 순간 불편해졌다. 접고 돌아오고 싶었다. 무심히 눈에 띈, 도록의 그림 한 점에 꽂혀 작가 탐방을 시작했지만 이따금 느껴지는 회의감은 어찌할 수 없는 자괴감으로 찾아온다. 누가 취재를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전화를 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갑자기 막막해지며 순간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어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서 내려 그림들이 세워져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선다. 외부에 있던 작업실을 닫고 방 한 칸, 등에 업고 앉은 지 몇 년 째다. 작은 화단이 보이는 바람 잘 통하는 모서리 방이다. 햇볕이 쨍하게 바람으로 들이친다.

꽂혔던 그림들이 거기 옹기종기 앉아있다. 빨갛고 노란, 연두색이었다가 보라까지. 원색이면서도 원색답지 않은, 깊게 순한 색깔들이 애잔하게 앉아있다. 바로 전 불편했던 기억들이 일시에 사라진다. 어쩔 수 없는 역마에 스스로 웃어버린다. 사실은 성질이 나빠 그냥 가고 싶었어요. 내 말에 작가는 이미 표정을 다 읽은 듯 아뇨.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데요. 사실 나도 상태가 안 좋거든요.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그냥 웃는다.

▲ 동화(童話)-동화(同化).

 

살아 온 수많은 불면의 날들은 지금을 있게 해

원석을 발견했다. 아무도 아직은 발견하지 못한 원석이다. 긴 시간동안 연마를 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기 위해 스스로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강제로 잘라낸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될 원석이다.

원석은 제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힘을 주고 닦아내며 주변의 마음이 모아졌을 때 비로소 원석은 힘을 발휘한다. 보석은 제 스스로의 움직임에 따른 주변의 반응으로 이루어지고 만들어진다. 작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아!하는 탄성이 나왔다. 빛이 나는 것이 순간 느껴졌다. 작가의 그림들은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커다란 원석이었다.

 

▲ 오늘은-하늘에-별이-참-많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갔다. 비록 늦깎이 학생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대학생활이었고 늘 빠듯하고 긴장감 있는 시간들이 좋았다”고 고백한다. 마음만 두고 들여다보기만 한 그림에게 발목을 잡혔다.

아파트 한 쪽, 통풍 잘되는 모서리에 작은 작업실 하나 마련해 두고 시간만 되면 자신만의 성(城)으로 들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자신만의 동화 같은 집이다. 벽에는 지금까지의 작업들이 차곡차곡 걸려있고, 바닥에는 물감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 달이-떴다.

 

찬란한 빛깔 속에 스민 고통과 서러움

눈물도 웃음도 그 안에서 각기 다른 색으로 표현된다. 지나간 시간도 앞으로 다가올 신산함도 역시 그 안에서 만나고 보낸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그림 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비할 수 없이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그녀는 수많은 불면의 날들을 보내 온 작가가 맞다. 털어버릴 수 없는 고통. 바로 그림에 대한 작업의 열망이다.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너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 한꺼번에 무너진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깊이 수면 아래로 침잠하는 것을 느낀다. 화려하고 밝아 한 편의 동화를 보는듯 하지만 사실은 눈물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고백이다.

▲동화(童話)-동화(同化).

붉은 색으로 덧칠해진 피울음, 잘 깎여진 연필처럼 보이는 뾰족 지붕들로 이루어진 집들은 작가가 열망하는 그만의 영혼의 집이다. 편히 들어가 쉴 수 있는 집,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두 다리를 쭈욱 뻗을 수 있는 집이다. 분홍으로 이루어진 분홍 집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화(童話)-동화(同化).

하늘에 뭉게구름 하나 둥실 더 있고 아직은 피지 않은 꽃 몇 송이 쭉정이처럼 자라 올라 하늘을 이고 있지만 꽃은 피울 수 없다. 영양을 받아 햇빛의 광합성을 해야 하는 이파리가 만들어낼 여력이 아직 없다.

 

동화(童話) -  동화(同化)

가장 눈을 사로잡은 그림은 꽃 한 송이 길게 누워 있는 작품이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작가는 수많은 터널을 파낸다. 가시처럼 돋아있는 작은 풀잎들은 그녀가 살아 온 인생의 여정이다.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길게 혹은 짧은 턴을 두고 그냥 속으로만 침잠하기도 하고 스스로 차올라 불쑥 밖으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가느다란 꽃을 피우는 줄기 위로 위태로운 집들이 단장되어 있다. 물론 동화 같은 알록달록 아름다운 집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영혼의 집을 내면에 두기 위해 그녀는 집 안에 형태가 무너지는 꽃을 그려 넣기도 하고 집 뒤로 아직은 미진한 집들의 형상을 불어 넣기도 하지만 이 모든 집들 역시 이루어지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꽃은 곧 피어날 듯 반쯤 꽃잎을 열었지만 그 꽃에는 뿌리가 없다.

▲동화(童話)-동화(同化).

슬프다. 환상적인 파스텔 색조로 최대한 동화처럼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는 작품들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점점 우울해지고 가라앉는다. 그림들이 말을 건다. 그냥 아름다움, 동화로 보아주면 안 될까. 안 돼. 그림 안 깊숙이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싶어. 비로소 보인다. 시간과 싸우고 있구나. 영혼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필요하구나.

일시 : 9월10일(금)~9월23일(수)
장소 : 북구 자미갤러리
문의 : 010-6338-8000

 

에필로그

무엇일까 /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대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있어야 하지 /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 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 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 詩. 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中>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가라앉는다. 우울해진다. 나의 삼십대가 생각나서다. 양희은의 노래처럼, 빨리 날개를 달고 싶었던 시간이었지.

햇빛 그친 낡은 문짝에 쇠못들이 박혀 녹슬고 있다. 잊혀 진 누군가의 이름들. 서걱이는 척추의 겨울. 퍼렇게 찍혀 넘어간 절망의 바다. 나는 꿈속에서도 필사적인 질주를 하며 땀을 흘리고 울었다. 절벽에 부딪혀 산산이 튀어 오르는 파도조각처럼 부서지고 싶었다. 그때.

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내 안에서 자꾸 꺼내도 잡히지 않는 인식의 무게. 기침을 한다. 내 울 안에 빛이 내린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울 안으로 쓸쓸이 묻어나고 바람은 설레는 시간의 살 속으로 흐르는 물이다. 검고 어두운 땅 속에서 언제쯤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걸까. 

그 겨울의 바람 속에서 나는 깃발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한없이 나부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 차 강물과 같이 누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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