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지상주의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 다스리는 ‘경전’
속도지상주의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 다스리는 ‘경전’
  • 노해경 기자
  • 승인 2009.08.24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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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토종 먹을거리'를 찾아서]⑤녹차

▲ 녹차는 속도지상주의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경전’이고, 녹차를 마시는 것은 토종의 세계화를 실천하는 지름길이다. 2천년을 이어온 전라도 토종이 세계인의 마음에 자리잡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녹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맛이나 향기 이전에, 건강을 돕는 식품이기 이전에, 녹차는 마음을 다스려 주는 ‘경전’이었다. 다기를 꺼내는 순간부터, 물을 끓이는 순간부터, 아니, 차를 마셔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몸가짐이 달라졌다. (중략) 녹차 마시기에는 기다림이 있다. 물이 끓는 동안 기다려야 하고, 또 물이 식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관에 물을 넣고 차가 우러나는 동안 또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고요해진다. 향이 그윽하고 맛이 깊은 녹차를 마시는 것은 몸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이문재 시인의 산문집 한 구절. 시인의 성찰은 속도지상주의가 추방해버린 기다림에 대한 향수를 넘어선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기다림이 엄연한 우리 삶의 한 자락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2천년 우리 삶 속에 뿌리내린 녹차의 맛·향·문화

동(動)과 정(靜)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생명체의 대사일진데 현대인들은 움직임만, 그것도 극단적인 속도만을 강요받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몸은 지쳤고, 마음은 무뎌졌다. 녹차를 ‘경전’의 반열에 올려야 함은 ‘차 문화’로 대변되는 품격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다.

‘외부도입설’과 ‘자생차설’이 팽팽한 우리나라 차(茶)의 역사는 문헌상으로도 2천년을 거스른다. 『삼국유사』는 ‘AD48년에 가야의 김수로 왕비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고 기술했고, 『조선불교통사』에는 이를 ‘경남 창녕군 북면 백월산에 심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차나무가 영광 불갑사 앞마을·보성군 조성면 다전마을 비롯한 각지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점, 그 기원도 파악할 수 없이 오래된 점, 또 도입됐다고 주장되는 곳의 종들과 구별도 쉽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자생차설’에 무게를 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차는 삼국~고려시대에 불교와 함께 융성했다. 당나라 다성(茶聖)으로 불리운 육우는 780년 그의 저서에서 백제와 신라의 인삼과 차맛을 매우 극찬했고, 고려시대에는 차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다소 21개를 두고 공신들에게 차를 하사할 정도로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차 문화가 주춤했던 것도 잠시 초의선사·다산·추사 등은 다시 중흥기를 이끌었다. 특히 초의선사는 그의 저서 『다신전』, 『동다송』 등을 통해 우리 고유의 다도를 확립해 우리 차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일제시대 보성·나주·광주 등에 근대적 차재배가 들어왔고, 우리 차의 우수성이 알려진 1988년 재배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2004년 정점이었던 것이 중국산 ‘농약파동’의 유탄을 맞은 2007년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유기농 재배 등 철저한 관리를 기반으로 다시 저변을 확대해가는 추세다.

차를 전라도 토종으로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사정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전국 250곳의 차 자생지 중 80%가 전남에 산재해 있고, 광주·전남은 전국 차 재배면적의 56%인 2600ha, 생산량의 63%를 담당하고 있다. 

김정운 박사 발품으로 종 확보, 참녹·보향 등 명명

특히 보성군은 녹차의 메카다. 전국 재배면적 30%(1100ha), 900농가(전국 3000농가)가 밀집해 있고, 92년 설립돼 농촌진흥청에서 공인한 차 유전자원 보존기관인 전남농촌기술원 녹차연구소(소장 박종대 박사, 이하 녹차연구소)가 위치해 있다. ‘다향(茶鄕)전남’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신품종 육성, 재배법을 확립, 차 관련 각종 제품 개발 및 농가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는 녹차연구소는 최근 ‘우리 차 세계화’를 목표로 각고의 노력 중. “우리나라는 차 문화는 발달했지만, 과학적인 접근은 미미한 수준이다”는 박 소장은 차의 기능성에 주목 그 구체적인 성분을 데이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성분 분석에 권위가 있는 미국 SensusLLC사와 텍사스 A&M대학에 실험을 의뢰한 것도, 지난 5월 세계 5개국이 참여한 국제 차 심포지엄을 개최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박 소장은 많은 부분이 진척됐고, 내년이면 괄목할만한 성과도 확보할 수 있다고 전했다.

▲ 전남농업기술원 녹차연구소의 김정운 박사의 집념은 토종 녹차의 오늘이 있게 했다. 발품으로 2254종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고유의 차 품종을 개발 최초로 ‘참녹’, ‘보향’, ‘명선’ 등 이름까지 부여했다. 사진은 보급을 위해 육성 중인 참녹, 보향.

하지만 무엇보다 92년 연구소의 출발부터 차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김정운 박사의 집념은 감동이었다. 그는 전국에 있는 다전, 다산 등 차와 관련된 지명 중 파악 가능한 240곳을 돌며 2254종의 유전자원을 수집했다. 그리고 데이터화하고, 육종자료를 연구소로 옮겨왔다. 남다른 열정만큼 차 사랑이 지극한 김 박사.

“차나무는 동백나무과지만 다른 종들과는 달리 성스러운 나무로 숭앙받는다”는 그는 “올해의 꽃과 지난해의 열매가 함께 공존하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산등성이의 등고선을 따르듯 곡선의 미를 한껏 살린 우리 차밭에 대한 칭찬도 곁들이며, 상당한 수준으로 전해지믄 백제의 차 문화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내비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 박사의 공로는 지금껏 차 일반으로 불려왔던 자생종을 수집·개량해 우리나라 최초로 ‘참녹(진짜녹차)’, ‘보향(寶香, 보성의 향기)’, 명선(茗禪)을 탄생시키고 이름을 부여한 것.

이는 토종에 대한 애정과 우리 차에 대한 집념이 이뤄낸 쾌거다. 김 박사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우리 차를 갖게 된 것이다. 또 3년 전부터 재배농가에 보급을 시작한 상태고 2012년까지 전 농가의 5%를 이들 품종으로 갱신할 계획이다.

“토종이란 우리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다”는 그는 일본 ‘야부기다’ 등 외래종이 주종을 이루는 사정을 개선하고, 세력이 강하고 맛과 품질이 더 뛰어나기에 농가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여기에 지자체의 노력도 가세했다. ‘녹차수도’를 선언한 보성군과 ‘다향전남’을 표방한 전남도도 차의 세계화에 적극적이다. ‘친환경농산물 인증’, ‘군수품질인증제’를 실시하는 한편, 해외시장을 겨냥해 국제유기인증 취득을 역점적으로 추진했다. 그결과 지난 4월에는 국제인증기관으로부터 보성 18농가 128ha가 유기인증을 받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국 4000ha에서 경작되는 양은 세계 생산량의 0.1%에도 미치지 못하고, 연구 인력도 총 27명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중국 1600명, 일본 160명, 대만 60명인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수치다.

연구시스템이 열악하고 예산부족도 심각한 상태에서 희망의 싹은 뿌리내릴 수 없다. 최근 농식품부에서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한 것이 그나마 다행. 또 노동집약적 성격으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점도 보완해야 할 숙제다.

여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편견도 깨져야 한다. ‘차는 구입이 아닌 선물 받는 것’이라는 논리는 1인당 1년 평균 80g 소비라는 수치로 나타난다. 1인당 평균 세계 차 소비량이 500g에 이르려면 차 마시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상황이다.  

녹차 마시는 것은 토종의 세계화에 일조하는 실천

정년퇴직 후 지난 25년간 보성에서 차를 재배해온 ‘보성신옥로제다’ 조상래 대표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두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고 있고, 각종 차 품평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서가 아니다. 차생산자조합 청년분과에 모인 20여명의 젊은이들이 든든해서다. 


78세의 고령인 조 대표는 처음 차 재배에 뛰어들었을 무렵 새로운 기술을 들여왔고, 최초로 녹차시음장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현재의 젊은이들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 그는 2004년 정점을 맞았던 시기를 회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차 재배의 원로답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먼저 내실 있게 차분히 관록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는 빠름 보다는 보다는 깊이를 주문했다.

우리 차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 기후·토양 등 재배조건도 좋아 세계적인 품질을 생산할 수 있으며 다만 과학적인 데이터를 갖추고 세계인들에게 적절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계속되는 한 차는 존재할 것이고 이는 지금껏 역사가 증명해 왔다”는 박 소장은 “다만 접하지 못해서 마시지 않을 뿐이다”는 말로 차를 권한다. 모처럼 세계인들의 마음을 향한 토종의 존재에 반가우면서도 그 1차적 걸림돌이 우리들의 편견이라는 말에 반성이 앞선다.

건강을 지키는 길이고, 속도지상주의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경전’을 받드는 길이기에 의무감마저 든다. 차 한 잔을 따르며 생존을 위한 본능에 충실했다는 뿌듯함을 느껴야 할 듯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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