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저물다…인동초 같은 삶 영욕의 정치역정
한 시대가 저물다…인동초 같은 삶 영욕의 정치역정
  • 장현준 기자
  • 승인 2009.08.2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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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에서 서거까지

△ 김 전 대통령의 탄생과 유년기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3년 음력 12월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후광리는 그의 아호 ‘후광(後廣)’이 됐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 ‘인동초’와 같은 정치역정

 

▲ 고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평민당 후보)이 대선에 두 번째로 출마한 1987년 12월 5일 조선대학교 운동장에서 가진 선거유세 장면.

그의 정치역정은 ‘4번의 죽을 고비’라는 표현처럼 파란만장했다.

1961년 36살에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쿠데타가 터져 의원직을 잃었다. 군정 기간 그는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에 걸쳐 한 달 남짓 감옥생활을 했다. 시름에 빠져 있다가 ‘평생의 동지’ 이희호 여사를 만난 건 2년 뒤인 1962년이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옮겨 노동조합의 지지와

목포상고 동창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중앙 정치무대에 발을 디뎠다.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 2006년 10월 전남대는 김 전 대통령에게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감사의 뜻을 담아 '경천애인(경천애인: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라 적힌 휘호 액자를 전남대에 선물했다.
△ 군사정권에 온 몸으로 맞서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 차로 석패했다. 그의 대권 도전은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도약한 계기가 됐지만 가시밭길에 들어서게 만든 원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으로 지목, 탄압을 본격화한 것이다.

1971년 8대 총선 지원유세 과정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또 1972년 유신개헌 당시 일본 체류 중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바다에 수장될 뻔한 위기도 맞았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 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 대권을 향한 도전과 좌절

1985년 입국 뒤 치러진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정국의 중심인물로 복귀했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이뤄졌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해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이듬해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들어 여소야대의 정국을 주도했지만 곧이어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후 야권을 재정비한 뒤 1992년 대권 3수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또다시 낙선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1993년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995년 지방선거 지원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 그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고 외환위기 충격이란 상황에 힘입어 1997년 12월 74세의 고령으로 마침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국민의정부 출범과 남북정상회담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국민의정부’를 표방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달렸다.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했다. 정보통신 산업 부흥과 벤처 붐도 일으켰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남북문제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햇볕정책’이라고 불린 그의 대북 포용정책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남북 당국 간 경제협력을 제의한 2000년 베를린 선언이 있었고, 마침내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 몸의 반쪽이 무너져 내린 것 같다"고 애통해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6일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권양숙씨의 손을 잡으며 끝내 오열했다. 이 모습은 국민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 노벨평화상 수상과 임기 말의 아픔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인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돼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광 뒷면의 그림자도 짙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재임 기간 지역갈등은 오히려 격화됐다. 경제위기 극복 차원에서 장려한 신용카드 발급은 임기 말이 되자 신용불량자 급증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임기 말이 되자 자식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고, 심장혈관질환과 만성신부전이 악화하는 등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 국민의 큰 어른으로

2003년 김 전 대통령은 ‘시민 김대중’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답게 전 세계를 돌며 인권과 남북관계에 대한 강연 및 연설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한 국가 원로로서 국민과 정치권에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지난해부터 정국을 ‘민주주의, 남북관계, 서민경제의 위기’로 규정하고 현 정부에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엔 민주평화개혁세력의 통합을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김 전 대통령에게 육체적·심리적으로 커다란 충격이자 시련이었다. 그는 “내 몸의 반쪽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라고 비통함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병색이 급속히 악화된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18일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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