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군 전설 서린 사시사철 아름다운 숲
황장군 전설 서린 사시사철 아름다운 숲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9.08.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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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전북 임실군 관촌면 방수리 방동마을 장제무림

방수리 방동마을을 찾아가는 길, 한자로 꽃다울 방(芳)자를 연거푸 쓸 만큼 아름다운 마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임실면 소재지에서 진안 방면으로 차를 20여분 쯤 달리자 오른쪽 샛길로 방동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동뫼’라 불리는 소나무 동산숲이 길손을 맞는다. 수백 년은 됨직한 노송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예로부터 방수리에 전해 내려오는 방수팔경(芳水八景) 중 제 4경인 송대백조(松垈白鳥)가 바로 이곳. 노송들 위로 백로들이 날아와 놀던 상서로운 풍경을 이르는 말이다.

동뫼는 마을 입구가 열려 있을 때 도로로부터 마을을 가려주는 ‘수구막이 숲’의 기능을 한다. 동뫼에 오르면 너른 들판 너머로 장제무림(長堤茂林)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장제무림은 방수팔경 중 제 8경으로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장제무림의 장쾌한 풍광을 보고 있노라니 왜 이곳이 ‘연거푸’ 꽃다운 곳인지 이해가 간다.

▲ 장제무림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노라면 나무들이 말을 건다. 바람과 시간이 전하는 말을.

방동마을에는 이 외에도 마을 앞 방미산 봉우리에 뜨는 가을 보름달 야경을 이르는 방미추월(尨尾秋月), 마을 서쪽 산에 석양 무렵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황홀경을 가리키는 안치낙조(雁峙落照) 등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이 오늘에까지 전한다. 그 중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원천을 따라 1.6km에 걸쳐 조성된 장제무림은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에게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든든한 성벽이었다. 장제무림은 홍수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한편 휴식, 모임, 놀이 등이 행해지던 유희의 공간이기도 했다.

500여년 전 홍수 막기 위해 조성한 숲 

방동마을은 형국상 뒷산이 게(蟹) 모양을 하고 있고 앞산인 방미산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으로 말이 방수리 앞의 물을 먹기 위해 내려뻗은 길지 형국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장제무림은 이 두 형국이 경계를 이루는 하천의 제방에 조성돼 있으며 면적이 2.5ha에 이르는 거대한 숲띠이다. 수종은 교목만 총 470여주로 방대함을 자랑하며 개서어나무, 느티나무, 팽나무가 주요 수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갈참나무, 신나무, 줄사철나무를 포함하여 다양한 식물들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숲이다. 원래는 세심대(洗心臺, 구은대(九隱臺)라고도 함)가 있는 곳에서부터 숲이 시작되었는데 749번 지방도가 뚫리면서 숲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발원한 섬진강이 오원천을 따라 흐르는데 기자가 찾은 날은 연일 내린 비 때문에 많은 양의 물들이 급하게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수원을 관리하는 이가 “물이 불어 위험하니 천변으로 내려서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래도 사진 몇 장은 찍어야겠기에 걱정 마시라고 다독이고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숲띠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급하게 눌렀다. 이왕 내친 김에 숲으로 올라 노거수들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거닐어본다. 비에 젖은 풀들이 발목을 적시는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다.

우중인 터에 마을과 다소 떨어진 탓인지 나무들 말고 인적은 찾아볼 수 없다. 수백 년 세월을 무심으로 버텨 온 나무들은 흐르는 빗물에 얼굴을 씻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기분 좋은 듯 잎사귀를 흔든다. 이날따라 더 정갈한 자태를 하고선 숲은 넘실거리는 오원천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유난히 굳세고 푸르러 보였다. 그러나 숲과 논둑 사이로 굴삭기 몇 대와 측량 푯말이 서 있는 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설마 숲을 없애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을 하며 장제무림에 얽힌 얘기를 들으려 마을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주로 짓는 방동마을은 60여호 12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회관 앞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던 주민 몇은 광주에서 장제무림 취재를 나왔다고 하자 “귀한 숲이니 기사를 잘 써야 된다”고 주억거리면서도 기자의 묻는 말에는 “글씨, 하도 오래 전 야그라서…”라며 엉덩이를 뺀다. 그래도 마을의 체면이 달린 일이라 당신들이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한마디씩 거든다.

“숲이 없었으믄 농사짓기가 참 곤혹시럽제. 냇가 물이 못 넘치게 단단히 막고 섰거든. 참 고마운 숲이여. 근디 3년 전엔가 비가 억수로 왔을 적엔 여그 학교 앞 마당까지 물이 벙벙해 버렸당께. 숲이 그나마 있었응께 그 정도긴 한디 큰 비에는 장사 없드만. 군에서 올해 70억원을 들여 제방공사를 한다등만. 둑을 쌓으믄 물이 쉽게 못 넘어오것제만 장제무림을 가려불게 되야서 마음이 쫌 그려.”

▲ 장제무림 옆으로 시멘트 인공제방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과 같이 멋드러진 숲의 모습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 모양이다.

자연 제방인 장제무림으로는 부족해 2m가 넘는 시멘트 인공제방을 쌓을 모양인데 오원천과 인공제방 사이에 납작하게 낄 숲의 나중 모습이 벌써부터 짠하다.
 
황장군은 나무 심고 부인은 보를 막고 

장제무림에는 숲을 처음 조성했다는 마을 수호신 황장군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500여 년 전, 이 마을에는 황장군이라 불리는 거인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따스한 봄날 자신들의 능력을 겨루기 위해 시합을 벌였다. 황장군은 천변에 나무를 심고 부인은 치마에 돌을 싸 날라 보를 막기로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황장군이 이겨 현재의 울창한 숲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마을은 홍수걱정 없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이야기처럼 장제무림은 들판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을 돌려막고 제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조성된 숲이다. 황장군이 실재한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주민들은 뒷산 안처골에 있는 황장군의 묘를 오늘날까지 정성스럽게 관리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력 2월 첫 용날에 지내는 보제(堡祭)는 해마다 오원천 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마지기당 1,000원씩을 갹출해 비용을 마련했다. 지금은 전승이 끊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공동으로 날을 받아 보맥이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정종열(79) 할아버지가 8년째 보제를 도맡아 지내고 있다.

“떡, 적, 나물, 묵 일속을 장만해 용날에 제를 지내고 때 되믄 황장군 묘에 벌초도 허고 농사철에는 물관리도 허고 그래요. 마을도 두루 평안하고 공들이다 보믄 우리 식구들한테도 복이 내리것지요. 허허”

공들임 탓인지 정 할아버지는 팔순이 가까운 연세에도 아픈 구석 하나 없이 정정한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보제를 맡을지는 몰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정성을 다하겠다고 덧붙인다.

황장군 묘를 찾아볼 수 없느냐고 하자 정 할아버지는 “봄이나 되믄 모를까 풀이 가슴께까지 자라 오르기가 쉽지 않다”며 기자를 말린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을숲은 마을 것이 아니다?

장제무림은 지난 2005년 산림청과 (사)생명의숲이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한 ‘명품’ 숲이다. 2006년에는 생명의숲 국민운동에서 동뫼숲과 장제무림에 후계목을 식재하는 ‘전통마을숲 복원사업’을 벌여 더욱 울창한 수림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갖는 장제무림에 대한 애착이 예전보다 덜해 보였다. 마을회관 안방에 붓글씨로 쓴 ‘방동팔경’ 액자를 걸어놓았어도 원래 마을 소유이던 숲이 군유림으로 넘어가면서 예전만큼 애정을 쏟질 않는다는 것. 주민들이 보를 지키기 위해 울력으로 보맥이를 하던 풍습이 사라진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을에서 만난 한 촌로는 “동뫼고 장제무림이고 동네 것이다 생각하고 살았는디 모다 군유림이 돼 부러서 옛날보담은 애착이 덜 간다”고 아쉬워했다. 

14회차 연재를 이어오는 동안에도 마을숲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 비슷한 얘기들이 흘러나와 내친 김에 임실군 산림축산과에 전화를 걸어 마을숲의 재산권 이전 내막을 물어 보았다.

“하천부지에 조성된 장제무림은 누구의 것이라고 말하기가 그렇습니다. 행정기관에서는 하천에만 관심이 있지 하천부지에 심어진 제방숲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썼다고 봐야죠. 최근에 와서야 마을숲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림청에서 산림법에 의거해 군이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관련부서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지 그 전에는 거의 방치상태였죠.” 군 관계자의 대답이다.

다시 풀면, 그 동안 마을숲은 논농사를 위한 치수(治水)차원에서 마을 자체적으로 규약을 정하고 울력으로 구멍 난 제방을 다시 쌓는 등 관습법 적으로 주민들에 의해 관리돼 오다가 산림법이 정비되면서 관리주체가 민에서 관으로 이양됐다는 것이다. 애초에 마을숲이 마을의 공유재산이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 하지만 지금껏 보존해 왔더니 군유림이 됐다면서 관리 운운하는 관청이 좋게 비췄을 리는 만무하다. 

이 과정에서 동제(洞祭), 숲 고사 등의 전승 의식의 맥이 일부 끊어지거나 울력으로 후계목을 심거나 보맥이를 하는 풍속들이 자취를 감춘 곳도 일부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의 고령화로 인한 세대단절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탁상행정의 결과라는 비판도 피해 갈 수 없다.

산림청의 마을숲 담당자는 이에 대해 “마을숲을 더 잘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하고 “지난해까지는 일부에 한정해 정부에서 ‘녹색사업’으로 관리지원이 이뤄졌고, 올해부터는 경관이 수려하고 보존가치가 뛰어난 마을숲을 대상으로 산림청이 직접 각 지자체에 예산을 지원해 관리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처럼 마을숲 역시 마을의 전통과 주민들의 정성이 살아 숨쉬는 문화원형이라는 점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더욱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다.

▲ 방동마을 전경. 가운데 야트막한 산이 ‘동뫼’라 불리는 동산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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