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부, 정치거래로 한일회담 매듭”
“한-일 정부, 정치거래로 한일회담 매듭”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08.18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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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 일한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 사무차장

이양수(58)씨는 재일교포 3세로 ‘일한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다. 올해 초 일본 측 한일회담 문서를 검토하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문서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공로로 지난 4월 제9회 ‘4·19 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조선인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1세 때 부모님과 함께 국적을 박탈당했다. 그 후 40여년을 무국적 상태로 살아왔다. 그의 나이 10살 때 아버지와 이혼한 일본인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북송귀국선에 오르려 했지만 북한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후 일본의 유명 사립음대를 졸업한 그는 교향악단과 음악 강사로 30년을 살았다. 하지만 세계최대의 악기회사인 야마하의 민족차별에 분노해 강사직을 그만뒀다. 외국인 등록증 상시휴대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1982년 치바현에서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고 재일한국인 차별철폐와 인권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지문날인 거부로 불기소 처분을 받자 재판을 통해 일본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바꿨다.

▲ 이양수 차장이 일본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문서를 들어보이며 현재 진행 중인 전면공개 소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도쿄에서 이 차장을 만나 한일회담 문서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징용 피해자 대일청구권·재일동포 법적지위 등 해결 외면”

▲‘일한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은 어떤 단체인가?
-일본정부에 한일회담 문서의 전면공개를 요구하기 위해 2005년 12월 만들어진 모임이다. 일본정부와 전범기업들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2005년 8월 한국정부가 먼저 회담문서를 전면공개 한 것에 크게 자극받았다. 그해 12월 한국인 일제피해자 188명과 일본인 143명을 청구인으로 모임을 결성했다. 세계의 어느 누구라도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일본의 정보공개법에서 착안했다. 일본의 현행법은 30년 이상 지난 외교문서에 대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60년이 지나도록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한일회담 문서 전면공개 싸움에 나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1998년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지원회와 피해여성 7명이 일본정부와 미쯔비시를 상대로 재판을 벌였다. 당시 소송사건의 비디오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나고야 지방재판소가 1심판결에서 기각결정을 내렸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따라 대일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한일청구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 측 공개한 한일회담 문서 6만쪽 중 25% 먹칠 공개

▲그동안 수차례 정보공개 소송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2006년 4월25일 일본 외무성에 한일회담문서 공개를 청구했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1년7개월 동안 고작 7천 쪽의 자료만 공개했다. 2007년 12월28일 일본법원은 외무성이 직무를 태만히 했다며 위법판결을 내렸다. 정보공개법에 따르면 청구가 제기된 날로부터 30~60일 이내에 정보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그 때문에 1차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2008년 4월에는 2차 소송을 제기했다. 3차로 공개한 문서 5,340쪽 가운데 먹칠 된 부분을 공개하라는 요구였다. 먹칠한 상태로 공개한 것은 공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2007년 5월까지 약 6만여 쪽의 회담문서를 추가로 공개하면서 전체 문서의 25%를 먹칠처리 했다. 도저히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이전까지는 기재돼 있던 문서작성 날짜들도 누락돼 있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인 문서더미를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지속적으로 시정을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지난해 12월17일 먹칠문서의 공개를 요구하며 3차 소송을 제기했다.

▲ 일본정부가 공개한 문서 6만쪽 가운데 25%가 먹칠이 된 채로 공개됐다.

▲소송은 어디까지 진행됐나?
-현재 먹칠된 부분의 공개를 요구하며 2, 3차 소송을 진행 중에 있다. 2차 소송은 10월 말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결심공판이 예정돼 있다. 판결까지는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3차 소송은 한국 측에서 250명, 일본 측에서 145명이 청구인으로 나서 6만 쪽 가운데 먹칠된 25%의 전면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이용수, 최봉태, 이금주 등 3명이 대표 청구인이다.

▲한국과 일본의 문서 대조작업을 벌이다 독도와 관련된 법령을 찾아냈다고 들었는데.
-1951년 6월6일 공포된 일본의 ‘총리부령 24호’가 그것이다. 제2조를 보면 일본 땅에 속하지 않는 도서로 ‘울릉도, 독도 및 제주도’를 명시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독도를 특정해서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문서다.

일본정부는 1905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 땅으로 편입한 지방고시를 근거로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1951년 공포된 이 법령으로 그 근거가 사라졌다. 이 법령은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 공제조합이 전후 재산처리를 위해 근거로 삼은 법령이다.

▲일본정부의 반응은 어땠나?
-아소총리는 ‘총리부령 24호’가 영토에 관한 법령이 아니라고 궁색하게 변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마네현 고시에 대해 물으면 애써 침묵으로 외면한다. 일본정부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려면 먼저 먹칠 된 독도문제에 관한 파일을 공개해야 한다.
 
“회담 문서 분석 도중 독도 한국영토 입증 중요문서 발굴”

▲먹칠된 문서에는 또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나?
-우선 문화재 목록이 있다. ‘한국국보 고문서적’ 목록과 ‘한국국보 미술 공예품’ 목록 등이 그 것이다. 일례로 도쿄 국립박물관이 한국에 기증(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고 돼 있다)한 미술품 리스트 목록과 숫자, 출토지 등이 모두 먹칠 돼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바로 다음 페이지에 먹칠로 감춘 문화재의 구체적인 이름과 출토지가 확실하게 명기돼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정부가 문서공개를 서두르다가 벌어진 웃지 못 할 촌극이다.

또 한국 측이 일본에 청구한 8개 항목 가운데 ‘조선총독부 도쿄 사무소의 재산’도 먹칠된 부분이다. 식민지시대 한국에 본점이 있었던 회사들이 일본 내에 설치한 지부들은 한국에 귀속되고 일본정부는 그것을 반환하든가 아니면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하라는 요구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본영토를 규정하는 일람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울릉도와 죽도, 제주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규정돼 있었다.

“한국인 감시원 B·C급 전범취급…148명 중 23명 처형”

▲한일회담에서 소홀히 다뤄졌거나 배제된 내용이 있다면?
-태평양 전쟁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과 재일교포의 법적지위 등의 문제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의견이 회담에 직접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회담을 통해 재일교포들의 법적 지위와 생존권 문제가 결정됐는데도 정작 당사자들의 의견은 무시됐다. 한일 양국정부끼리 정치적인 거래로 회담을 끝마친 것이다.

특히 일본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고용됐다가 전후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한국인들의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들은 일본상관의 명령에 따라 포로들을 감시했을 뿐인데 전후 전범으로 취급됐다. 일본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B·C급 전범은 148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23명이 처형됐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전쟁 후 보상과정에서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은급, 연금 등의 보상에서 이들을 제외했다.

재일교포들은 지금까지 생존권과 재류자격, 강제추방, 교육과 취업, 외국인 등록법 등 모든 방면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다.

▲한일회담이 기형적으로 진행된 이유를 든다면?
-한일회담이 시작된 것은 1951년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창 중인 때였다. 또 한일회담 3년전 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외교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한일회담의 첫 대표로 아무런 외교경험도 없는 양우찬을 보냈다.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신변을 돌봐준 사람의 아들이란 것뿐 아무런 이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양우찬은 한국에 살았던 적도 없었고 한국어도 익숙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일본 측 문서에 “한국을 모르는 이런 인물은, 일한회담의 대표로서는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왔겠는가.

그에 비해 일본은 19세기 중반 미국 등 구미열강과 개국과정에서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해나갈 정도로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다. 일본은 회담과정에서 식민지 침략을 부인하고 오히려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을 반환하라는 전략을 썼다. 일본은 1951년 10월 첫 예비회담이 끝난 뒤 ‘한반도에 남은 일본 측의 재산규모가 엄청난 점에 비추어 한국 측의 대일청구는 원칙적으로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지침을 극비문서로 남겼다.

▲일본정부가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에 대해 반환청구를 하려고 했단 말인가?
-그렇다. 청구대상은 일본이 식민지 시대 한반도에 만든 회사나 공장, 항만, 철도 등의 시설과 일본인이 소유하던 땅이나 재산 모두가 포함된다. 한일회담 당시 양측에서 이를 계산했는데 한반도에 속하는 전 재산의 80~95%가 일본인 소유라는 숫자가 나왔다. 어떻게든 한국 측의 청구금액을 깎기 위한 술책이었다.

1953년 11월 일본 외무성 정보문화국이 발행한 잡지 ‘세계의 움직임’ 특집호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에서 받아야 할 금액은 약 140억 엔에 이른다. 반면 일본이 한국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20억 엔이다.

식민지 지배 미 청산 비용보다 일본이 한반도에 남긴 돈이 더 많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이 배상해야 한다는 이상한 셈법이었다. 일본도 이를 알았는지 공공연하게 한국에 요구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 문서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향후 활동계획은?
-지금 소송에서 우리가 승소하면 한일회담 문서가 전면공개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 한국에 지불한 금액이 피해자 보상금이 아니라 경제협력자금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현재 일본국적의 전상병자·전몰자, 미귀환자들의 유족들은 매년 ‘특별 급부금’을 지급받고 있다. 특별 급부금은 야스쿠니 신사에 묘를 보관하는 대가다. 해마다 8월15일이 되면 특별 급부금을 받는 유족들이 야스쿠니에 모여 성대한 전몰자 위령제를 벌인다. 그런데 한국의 군인·군속이나 유족들에게는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모든 문서가 공개되는 시점에서 우리들의 다음 투쟁은 시작된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미지불 임금과 산재 보상금 등의 지급에 관한 법률 제정을 요구하는 싸움을 전개하겠다. 1965년 한일협정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모든 면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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