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신령한 정기와 농민 지극정성의 결정체, ‘푸랭이’
무등산 신령한 정기와 농민 지극정성의 결정체, ‘푸랭이’
  • 노해경 기자
  • 승인 2009.08.14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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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라도 토종 먹을거리를 찾아서 ④무등산수박

▲ 사람의 오감(五感)을 단박에 사로잡는 무등산 수박은 투박함 속 부드러움을 간직해 무뚝뚝하지만 정 깊은 전라도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옛 명성을 위해서는 과거 민·관·학이 함께했던 ‘무등산수박연구회’ 등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사진은 무등산 ‘큰선배바위’의 정기를 한껏 받고 자라고 있는 무등산 수박.
단박에 오감(五感)을 사로잡는 과실이 또 있을까.

먼저 그 크기에 눈이 휘둥그레. 칼로 쪼개자 진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방안 가득 넘실. 한 입에 은은하고 담백한 깊은 단맛이 균일하게 입 안에 듬뿍. 부드러운 육질이 치아와 부딪히며 삭삭거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감칠맛은 비단 혀만의 호사가 아니었다. 몇 쪽 촉감에 아쉬워하는 손도 연신 투박한 새 조각을 찾아 호사에 동참한다.

여름철 흔히 즐기는 줄무늬 수박과는 감히 비교불가.

단박에 五感이 함께 호사를 누리게 하는 감칠맛

하나의 과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많은 모습들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등(無等)을 닮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일까.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전라도 사람들을 쏙 빼서 투박한 외모에 부드러운 속살을 감추고 있을까. 여기에 방안 가득한 향을 더듬으며 큰 뜻을 품고 그 의미를 실천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왔던 우리네 기개까지 떠올리는 무리수를 둬 본다.

이수광이 1614년에 쓴  지봉유설 에 무등산수박의 기원이 전한다.

때는 고려시대, 고려인이었다가 몽고로 귀화해 몽고의 고려침략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홍다구(1244~1291)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 무등산 수박의 종자였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처음에는 개성에서 재배했고, 이후 무등산으로 옮겨와 토착민들에게 재배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 나라님께 바치는 진상품으로도 그 명성을 떨쳤던 것이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광주를 대표하는 지역특산물로 전국 호사가들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무늬 없이 푸르다는 의미로 ‘푸랭이’로 불리는 무등산수박. 진초록색에 모양은 타원형으로, 그 무게만도 10~30kg를 넘나드는 대형 과실이다. 껍질이 두껍고 탄력성이 강해 충격에도 쉬 깨지지 않는다.

매년 5월말~6월초 크고 백색이며 눈에 검은 점이 있는 씨앗을 해발 300m부근 모래 성분이 많은 양토에 파종한다. 물론 안개가 많은 기후를 벗 삼아야하고, 수확은 8월말~9월말 경에 이뤄진다.

8kg 한 덩이에 2만원. 1kg 추가될 때마다 1만원씩 올라가고, 16kg이 넘어가면서 부터는 1kg 당 2만원씩 붙는다. 30kg 정도의 초대형이라면 부르는 것이 값.

속정 깊은 전라도인 쏙 뺀 투박함 속 부드러움

하지만 한 덩이 무등산수박은 무등산의 신령스러움과 재배자들의 정성의 결집체.

예부터 무등산수박 재배농가들은 온 정성을 쏟은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무등산에 그 허락을 구할 수 있는 신령스러운 과실이라고 생각해 왔다. 파종 후 매일 수박과 동고동락하는 것은 기본이고, 수확 철에는 상가(喪家)를 찾지 않으며, 상중(喪中)인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목욕재계한 후 기원제를 열어 산신께 고하고, 정갈한 마음을 바친 다음에야 수확했으니 그 지극정성이야 오죽했겠는가. 명맥이 끊기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다음달 5일로 예정된 ‘무등산수박축제’에서 그 정성스러움을 볼 수 있다.

무등산수박이 재배되는 곳은 북구 충효동, 금곡동 일대. 16농가가 4.5ha 면적의 무등산 자락에 기대 연간 3000~4000덩이를 생산한다. 대부분 재배농가는 벼농사를 주업으로 수박재배를 부업으로 삼고 있다.

오는 25일 올해의 첫 출하를 앞두고 경건하면서도 분주한 금곡마을. 그곳에서 20년 넘게 무등산수박을 재배해온 문병술 '무등산수박생산조합장'의 낯은 밝지만은 않았다.

재배농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목반을 만들어 파종부터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지만 무등산수박 재배의 현실은 녹록치가 않다. 무겁게 입을 연 그가 토로한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 재배의 어려움과 지원의 미흡이었다.

“무등산 수박은 재배가 어렵다. 요즘엔 덜하지만 연작(連作) 피해가 속출하고, 청벌레 등 충이 많아 애를 먹인다. 장마·태풍 등 수해에도 취약해 한 해 농사를 탈탈 털고 일어선 적도 있다. 그만큼 까다로운 작물이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는 20년간 재배해온 노하우로 극복이 가능한 내용들. 더욱 큰 아쉬움은 “지역 특산물 1호를 광주시에서 이렇게 홀대하며 방치할 줄은 몰랐다”는 그의 푸념에 섞여 있었다. 

▲ 무등산수박.
무등산 중턱 500m 최고지에서 새벽부터 무등산수박을 어루만지며 안간힘을 쏟는 그에게 지금 남은 것은 700년 토종을 내손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의무감 뿐. 지금껏 그가 무등산수박의 보존과 번성을 위해 펼친 노력은 적지 않다.

수해피해를 막으며 보다 안정적으로 과실을 확보하기 위해 비 가림 하우스를 먼저 도입해 70~80% 농가의 모범이 됐고, 10년 전쯤엔 수박의 당도 확보를 위해 전남대 교수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펼치는 등 안간힘을 썼다. 지자체에서도 당시엔 적극적이었지만 3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연간 전체농가에 3000~4000만원을 광주시와 북구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고작. 그것도 주로 친환경 자재 구입 등의 명목이다. 무등산수박이 10~11브릭스(Brix, 당도측정단위)인 반면 시중 수박은 품종개량을 통해 13브릭스를 넘어섰고, 지천에 자극적인 단맛이 넘쳐나는 세태에서 지금처럼 명맥만 유지해가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문 조합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조바심이 났다.

가뜩이나 자극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낮은 수익성 때문에 하나둘 포기해가는 농가들을 보며 스스로도 많이 지쳤다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민·관·학 함께했던 과거의 경험 되살려야 할 때

뒤늦게 수박농사에 뛰어들었지만 함께 활동하고 있는 생산조합 작목반 정태영 총무도 마찬가지. “약 10년 전 생산조합이 생기고, ‘무등산수박연구회’가 발족하고, 30여 농가에서 5000덩이를 생산했을 때가 그나마 전성기였다”고 회상하는 그는 “당도를 측정하는 기계가 파악할 수 없는 감칠맛은 먹어본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인데 맛을 수치로만 판단하는 소비자들의 태도가 아쉽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마냥 포기할 수 없는 일. 이들은 발상을 전환해 위기를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무등산수박만이 가지는 기능성에 주목해볼 계획이다. 우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올해엔 성분분석 의뢰를 통해 소문으로만 떠돌던 효능에 대한 제대로 된 데이터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경우 차별화된 전략으로 무등산수박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겠다는 심산이다. 이제 지자체에서도 그간 소홀했던 점을 시정하고 지역 특산품 1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시기가 왔다.

10년 전 존재했다 지금은 사라진 ‘무등산수박연구회’는 민·관·학이 공동으로 우리의 토종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보여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연구회를 필두로 공동수탁판매제, 리콜제, 명성회복운동 등을 펼쳐 시쳇말로 무등산수박이 ‘없어서 못 팔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700년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겠지만 서서히 고사하면서 뽑힌 뿌리는 다시는 살릴 길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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