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미륵을 찾아”
“내 안의 미륵을 찾아”
  • 범현이
  • 승인 2009.08.14 18:4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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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을 날고 싶은 작가 김규완(51)

▲ 김규완 작가.
약속을 하고 시간이 되어 찾아가면 자물쇠를 걸어두고 사라지고 없다. 아무런 의도 없이 그 길 앞을 지나다 생각이 나서 들려보면 나팔꽃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어서 오라고 반긴다. 다용도 테이블 위에는 늘 막걸리가 있다.

굳이 약속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인터뷰를 하고 이것저것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이란 것도 잘 안다. 어쩌면 일부러 전화를 하고 놀리듯 그를 긴장시키는 것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마 이것까지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작업의 진도가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얼굴의 주름을 셀 수도 있다. 얼굴을 마주볼 수는 없지만, 두 몸 똑같이 뜨거운 피 흐르는 등뼈가 붙어있는 샴쌍둥이처럼.

오랜 시간, 작가를 지켜보았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맛있는 파김치를 담가 사각봉지에 넣어주기도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잘 받아먹는다. 잊지 않고 지나는 길에 또 메모를 남긴다. 양철대문에 자석으로 붙여둔다. ‘맛있어.’

빛이 보이지 않은 터널 - 작가 자신이다.

고통스럽다.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걸리와 그림이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

막걸리에 취해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작업의 시간은 길어지고 용량은 방대해진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스케치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표현되는 그의 그림은 몽환으로 돌아온다. 꿈꾸는 듯한 눈빛에서부터 작업은 동일하게 진행된다. 그림이 뭐 별건가.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되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지만 정확한 스케치를 통한 작업 안에서만 채색으로 옮겨간다.


작가의 그림은 매우 몽환적이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미륵이 존재하는 고통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둥둥 떠다니는 유니콘 같은 한 마리 말, 그 말을 타고 있는 한 사람, 구름, 바다 속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의 형상들, 푸른 빛, 날개만 더 커다랗게 표현되는 새들, 통념적인 빛깔에서 벗어난 달, 하늘을 나는 물고기 등등이 모두가 작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색과 형상이다.

오랜 시간을 푸른빛으로 살아왔다.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한가지만을 작업하며 지금까지 버텼다. 이제는 그가 나는 날고 있는 말에 올라설 차례다.

환상적이고 유연한 초록 물결과 푸른빛 사이로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투명한 유리 속 세상이다. 훤히 바라볼 수는 있으나 영원히 같이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 20여년이 넘도록 한 곳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그에게 웃으며 말한다. 동면(東面)에 살고 있으니 동면(冬眠)을 할 수 밖에. 그는 빙긋 웃을 뿐이다.

그림 안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서 성을 쌓고 자기만의 식솔을 거느리고 산다. 조그만 아이 하나,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얼굴보다는 매번 팔 다리가 더 긴, 머리를 풀어헤친 산호초 같은 여자 하나, 그리고 그 둘의 형상을 쫓고 있는 다리만 견고해 보이는 남자 하나.

그 속에 달이 있고 세상의 개벽을 알리는 미륵이 있고, 현재와 미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주는 나는 말인 유니콘이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유니콘에는 기다란 꼬리만이 있을 뿐, 어디를 찾아보아도 날개는 없다. 결국 둥둥 떠 있기만 할 뿐, 유니콘은 날을 수 없다. 날고 싶어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 다만 희망만이 환상 안에 영혼으로 있을 뿐이다.

둥둥 떠다닌다. 먼지처럼 한없이 모든 그림들이 떠다닌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목덜미가 서서히 뜨거워진다. 어딘 가에도 쉽게 안착할 수 없는 영혼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작가의 처연한 시간 속의 삶이 보인다.


한 때는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나무가 열매를 맺고 가지와 잎사귀 안에 새를 품어야 하는 시기는 고통의 모든 시간이 지나 미륵으로 흙이 되었을 때다. 바닥이 빛나는 땅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거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미륵의 몸 위로 한 그루 나무가 풍성할 수 있다.

세상 모두의 표정을 화폭에 담아

조각조각의 마음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세상의 모든 표정과 몸짓들이 거기 담겨 있다. 울고 웃는 표정,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움으로 넣어졌다. 하나씩 그리다보니 여러 개가 되었고 계속계속 그려서 조각그림이 되었다.


어디를 보아도 부자연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억지가 없다. 마음이 가는대로, 그리고 싶은 알곡만을 선택하기 때문이리라. 둥글어지기까지의 한없이 눈물겨운 모서리 각진 시간들과 고통이 눈에 보인다.

표정을 보는 작가의 눈빛은 매우 냉소적이다. 즐겨 사용하는 화려한 초록과 푸른빛도 사용하지 않고 무채색으로 일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살아있는 영혼이 분명한대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전달을 할 수 없다. 화석처럼 굳어진 얼굴로 더 이상은 하고 싶은 말도, 해줄 말도 없다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형상은 다르다. 각기 다른 화려한 표정으로 춤을 춘다. 나 여기 있어. 온 몸으로 팔 다리를 최대한 크게 움직이며 춤을 춘다.

작가는 살면서도 죽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막걸리로 서서히 부풀어 오르며 사실은 방부되며 자신을 스스로 말려가고 있는지. 곧 나는 말에 오르려면 최대한 몸무게를 줄여야 하니깐.

문의 : 061-373-2205

에필로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같이 있을 때의 편안함. 내 손인 것 같은 익숙함.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 같은 어리석음.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힘없는 책갈피는 내 마음 속에 너무나 많은 방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두었음을 알게 할 것이다. 어리석게도 기록할 것이 너무나 많았구나. 천천히, 바삐, 제 스스로, 화에 못 이겨 쏘다니며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무언가에 사로잡히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홍수가 나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해질 때가지 나를 참게 한 힘이기도 하다. 일체의 머뭇거림을 멈추기엔 나는 너무나 아는 게 없다.

1년 넘은 시간, 작가탐방을 진행하면서 내 원고를 받아주고 채근하며 웹에 올려주던 사람이 이 원고를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앞날이 혜안으로 가득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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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이 2009-08-21 22:18:36
마음으로 읽어주신것을 먼저 감사드립니다. 얼굴만 다를 뿐 산다는 것은 모두가 한 시간, 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대이고 그대가 또 나인 것임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서야 비로소 압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습한 날씨..건강하시길.

징글벨 2009-08-20 11:32:05
사소한(?)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확인하기 위해
또는, 나를 잊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답니다.

<에필로그>가 맘에 와 닿네요...

마치 내 이야기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