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에는 숲쟁이가 있다
법성포에는 숲쟁이가 있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8.13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마을숲을 복원하자
⑬전남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법성리 숲쟁이

법성포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굴비를 떠올릴 것이다. 굴비백반집을 떠올리면서 군침을 삼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알코올 함량이 무려 50~60%에 이르는 ‘토종’도 기억할 것이다. 간혹 법성포단오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숲쟁이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와 법성리에 걸쳐 있는 숲쟁이는 생태적·민속적ㆍ역사적 의미가 경관에 잘 함축되어 있어 2007년 2월 명승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수령 300년 안팎의 느티나무 130여 그루, 개서어나무 10여 그루, 팽나무 3그루가 울창한 마을숲을 이루고 있다.

▲ 매년 단옷날이 되면 숲쟁이를 무대로 하여 법성포 단오제가 열린다.

1514년 법성진성과 함께 조성된 숲


숲쟁이에서 내려다보이는 법성포는 공사 중이다. 법성항 매립공사로 인해 넓은 갯벌과 기다란 갯골로 이루어진 옛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어선들은 칠산바다가 그리워 연신 몸을 흔들어대지만, 물이 빠진 바다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법성포에서는 바다도 포구에 갇히고 만다.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큰 법성포에서는, 물이 빠지면 어선도 바다도 더 이상 칠산바다로 나가지 못한다. 갈매기만 오락가락하면서 포구 너머 칠산바다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줄 뿐이다. 바람이 건듯 불고 지나가면 소금에 절인 비린내가 숲쟁이까지 올라와 코끝을 스친다.

어선과 바다는 그렇게 질퍽한 갯벌에 스며든 채 물때를 기다린다. 갯벌의 가장자리에 이물을 들이박은 어선이 점점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갈 즈음, 저편 칠산바다로부터 한 자락의 물줄기가 갯골을 헤치고 포구로 흘러든다. 어선과 바다는 이윽고 칠산바다와 접속하여 생의 끈을 잇는다. 물이 차오르자 배 한 척이 엔진소리를 내며 포구를 빠져나간다.

법성포에서의 간만(干滿)은 단지 물이 들고 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성포에서는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동의어의 반복일 뿐이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처럼, 간만은 시작되는 곳에서 끝이 나고 끝이 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생과 사의 영원한 반복, 윤회(輪廻)와 닮아 있다. 생과 사의 모순이 그것의 양극단에서만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숲쟁이는 말없이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법성포는 유서 깊은 포구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교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이곳 법성포로 들어와 백제 불교문화의 근원이 되었다.

법성(法聖)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고려 성종 11년(992년)에는 이곳에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다. 이후 조선 중종 7년(1512년)에는 영산포창이 폐창되면서 호남 제1의 거창이 되었으며, 많게는 인근 28개 군현의 세곡을 보관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외적의 침탈로부터 조창을 지키기 위해 수군기지인 법성진(法聖鎭)이 중종 9년(1514년)에 설치되고, 이때 진성과 함께 숲쟁이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법성포는 굴비의 대명사이다. 조기파시가 섰을 때는 칠산바다에 떠 있는 어선들의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어 칠산어화(七山漁火)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도 연간 5천억 원 규모의 굴비가 법성포를 통해 유통된다. 법성포는 불교의 도래지였고 조운의 거점이었고 조기파시의 중심지였다.

▲ 매립공사 전의 법성포항. 뒤쪽 인의산 산마루를 따라 조성된 숲쟁이가 보인다.

영광굴비도 숲쟁이가 만든다?


숲쟁이는 법성포의 역사와 문화를 끌어안은 채 500여 년을 풍찬노숙하고 있다. 인의산(仁義山) 능선에 조성된 숲쟁이의 ‘쟁이’는 ‘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 외에도 ‘숲쟁이’, ‘숲정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마을숲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성포 북쪽 산마루를 따라 300m 가량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숲쟁이는 겨울철 세찬 북서풍으로부터 포구와 마을을 보호해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왔다. 군사적인 목적도 숨어 있다. 토성과 석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법성진성의 토축을 튼튼하게 해준 것이다. 풍수적으로는 법성포를 둘러싼 와우형(臥牛形)의 취약한 형국을 보완하는 비보숲의 역할도 겸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인의산 산자락의 맥을 끊고 지나가는 법성포-홍농 간 도로가 뚫리자, 주민들은 소의 배에 해당하는 법성포의 주맥(主脈)이 끊겨 법성에 해가 미친다고 하여 도로에 의해 잘려나간 산자락을 연결하는 부용교(芙蓉橋)를 설치한 것이다.

영광굴비의 고유한 맛도 법성포 숲쟁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굴비도매업을 하고 있는 오봉수 씨(남, 51세)는 “염산(鹽山)의 천일염의 맛과 독특한 염장법인 섶간도 중요하지만, 숲쟁이가 북서풍의 찬바람을 적당하게 조절해줘 영광굴비 고유의 맛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영광굴비의 명성에 숲쟁이도 한 몫 한 셈이다.

본래 법성포의 숲은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법성진지도>에는 숲쟁이를 배경으로 한 법성진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법성포 사람들은 “인의산 등성이를 거의 다 덮을 정도였는데 6ㆍ25때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나무를 많이 벴다”고 한다. 그리고 “1970년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때 숲을 통과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노거수 30여 주가 베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법성진성을 따라 조성된 숲쟁이에 오르면 법성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포구에 내려서면 하늘과 맞닿은 채로 기다랗게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숲쟁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 법성포 단오제 제의행사의 하나인 당산제.

단오 난장의 무대가 되어온 숲쟁이


숲쟁이는 해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축제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진내리와 법성리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에 숲쟁이에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제물을 바치고 당산제를 모신다. 단오에는 숲쟁이를 주무대로 한 법성포단오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이때에도 법성포의 가장 큰 어른인 당산과 산신에게 먼저 제의를 올린다.

해마다 단옷날이 되면 갯골을 타고 들어온 축제의 밀물이 포구를 거쳐 인의산 고갯마루 숲쟁이까지 흘러든다. 법성포 단오제는 음력 5월 5일을 전후로 하여 3~4일 동안 거행된다.

▲ 옛 법성포단오제 당시 그네뛰기 모습.
숲쟁이에서는 산신제(인의제), 당산제, 한제(씻김굿), 오방돌기, 그네뛰기, 씨름, 널뛰기, 창포머리감기, 농악놀이, 국악경연대회, 연날리기대회 등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해안가에서는 수륙재, 연등행진, 노래자랑, 세계민속예술공연, 불꽃놀이 등이 펼쳐지고, 포구에서 칠산바다로 이어지는 뱃길에서는 용왕제와 선유놀이가 펼쳐진다.

단오제가 시작되면, 법성포는 난장(orgy)으로 바뀐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광기의 축제, 난장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탈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시간이 정지되고 모든 금기들이 해체되고 무절제와 과도함이 미덕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이 아니었다. 우주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혼돈의 끝에서 우주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난장은 카오스의 끝이었고 코스모스의 시작이었다. 난장은 갱신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난장은 신의 몸과 피를 다시 받아먹고 신의 모범적인 작업을 반복하여 스스로 갱신하기 위한 종교적인 의례였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말했던 것처럼, 난장은 갱신을 위한 자극이요, 혼란이었다. 그래서 난장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은 세속적인 질서를 벗어난 해방의 공간이요, 해방의 시간이었다.

예로부터 법성포단오제에서 부녀자들이 즐겨온 그네뛰기와 널뛰기는 금기로부터 해방되는 대표적인 놀이였다. 난장에서는 남녀노소의 차이도 없었고 신분의 차별도 해제되었다. 이날만큼은 마음대로 밖에 나와 억눌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펼 수 있었다.

여자들이 주도하는 선유놀이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법성포 단오제는 나눔의 장이었다. 저마다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싸들고 나와 남녀노소나 귀천의 구분 없이 서로 나눠 먹었다. 그리고 과년한 처녀총각들은 눈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었다.

‘동해안에는 강릉단오제, 서해안에는 법성포단오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성포단오제는 유명했다. 나라 살림의 밑천인 세곡을 보관하는 조창이 들어서고, 그것을 지키는 군사가 주둔하고, 세곡을 운반할 인부와 장사꾼들이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와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을 단오난장. 조기파시는 난장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지역의 물산객주들은 1850년경부터 ‘백목전계(白木廛契)’를 결성하여 단오제를 후원했다.

조운선에 세곡을 선적하는 시기인 단오 즈음에 보부상단이 법성포에 몰려들었고 그들 역시 단오제를 후원했다. 이러한 물적이 조건이 단오난장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숲쟁이의 역할이다. 무더운 초여름에 치러지는 단오난장을 가능하게 했던 또 하나의 조건은 숲쟁이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무대와 시원한 객석이었을 것이다.

법성포 숲쟁이는 북서풍의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숲이고, 와우형의 지형을 완성해준 비보숲이다. 한때는 외적의 침탈을 막아주는 방어벽이었고,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축제의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우리의 살림집 안방이 낮에는 거실이 되고, 밥 먹을 때는 식당이 되고, 밤이 되면 침실이 되어 왔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 낭비되는 공간이 없는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 /김경대 기자·정명철 전남대 문화재학 박사과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