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에서의 하룻밤
탐진강에서의 하룻밤
  • 전고필
  • 승인 2009.08.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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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 정남진

6월까지만 해도 남도의 저수지가 다 마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장마는 두 달여 째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 모라꼿이라는 태풍까지 몰려올 기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치는 과하면 넘치는 법. 태풍이 가면 이제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기상청의 장마예보가 사라진 원년이 된다. 제주에서 여행사를 하는 선배는 몇 해 동안 기상청을 몹쓸 기관이라고 핀잔을 했다. 휴가철에 이르면 장마가 북상한다고 장기예보를 던져 제주여행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예외 없이 제주는 폭염 속에 마른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던 경험 탓이다.

여하튼 장마 사이에서 위태로운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여행이다. 호기롭게 여행사를 하던 1990년대 중반 나는 야심차게 고군산열도의 선유도와 보길도의 섬 기행상품을 만들었다. 예약은 넘쳤고 곧 여행사의 살림도 여유가 돌 것 같은 예감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는 장마가 휴가철까지 비를 뿌려댔다. 예약은 취소되고 다만 몇 명 남은 예약자들은 비가와도 가겠다고 했다. 빗길의 위험 때문에 승용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나는 불과 대여섯 명을 태운 버스를 운행시키고, 한 달여 동안 적자는 물동이로 쏟아 붓는 것처럼 늘어났다. 그때부터 장마는 나의 적이 되었다.

▲ 정남진 물축제장 전경.

그런 와중에 지난 토요일 가족들과 길을 나섰다. 정남진 물축제가 열리는 장흥이 대상이었고, 숙소는 한옥을 개량하여 문화공간이자 민박집으로 활용하고 있는 장흥읍 송산마을의 ‘오래된 숲’이었다.

그곳에는 전남대 앞에서 청년글방을 하던 문충선 선생 내외가 터를 잡고 있었고 몇 차례의 인연이 있었던 곳이었다. 촌놈 출신이 촌마을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머쓱하기도 하지만 일단 떠남에 먼저 방점을 찍었다. 하여 늦은 시간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쏟아져 나온 짐들은 이미 광주의 대형마트에서 시장을 본 것들이었다. 지난 가파도 여행처럼 장흥에게 또 미안했다.

마침 준비 안한 것들이 있다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정남진 토요시장에 갔다.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우 고깃집에서는 이미 동이나 문을 닫은 집이 있을 정도였고 작은 슈퍼의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돈을 새고 있었다.

장흥이 생긴 이래 이처럼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몇 곳의 가게에 들려 모처럼 싸전에 갔다. 아직도 됫박을 사용하는 곳에서 4,500원하는 쌀을 두되 샀다. 그곳에 있던 장사하는 분들처럼 내 마음도 흐뭇해져 갔다.

한옥집에서의 일박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잠을 못 이루게 했다. 문지방과 마루와 대청, 사랑채, 곳간 등이 모두 여덟 명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뛰어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 마루에서 마당으로 맨발로 오르락내리락 하여도 저어하지 않는 가운데 밤은 깊어갔다. 주인과 어울린 술자리는 금세 가버렸고 물 축제장으로부터 오지 않느냐는 전화를 받은 주인장은 남자 몇이서 축제장으로 가자한다.

물경 밤 11시임에도 아직 사람들은 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소한 얼굴들 가운데 가끔은 익숙한 얼굴도 접하는데 주인장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는 얼굴들이다. 하여 여쭤보니 축제장을 찾는 태반이 이 지역출신의 향우들이라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 고향방문을 겸한 하계휴가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물 축제의 마케팅의 주요 표적이라는 말과 함께.

새로운 사람들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포장마차에서의 한 순배가 끝나고 누우니 새날 3시였다. 다음날 6시 소란한 소리에 일어나 보니 아이들이 마당에 가득하다.

그 아이들에게 낚싯대를 하나씩 주고 다리에서 지렁이를 끼워 주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부터 열한 살 먹은 아이들까지 저마다 한 마리 이상의 물고기를 낚는다.

▲ 워터파크가 아니어도 곳곳에서 물과 친화되는 경험을 했고 쉴때마다 우리는 장흥에서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물반 고기반인 송산 다리에서의 낚시를 거두고 이제 축제장으로 갔다. 어젯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석대보 일원에서 수영도 하고 체험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공연을 보고 있다. 캠핑장도 마련되어 있는 구조가 하계 피서객의 강수욕을 고려한 운영 같아 보였다.

아이들을 강수욕장에 두고 넓은 둔치를 공간으로 활용하여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축제의 모습과 또 다시 북새통을 이루는 정남진 시장을 둘러보았다.

무작정 이벤트를 벌이고 모두들 밤이면 돌아가는 여느 축제와 달리 놀이와 소비가 동시에 이뤄지는 축제장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 측면에서 유용해 보였다. 아쉬운 점은 생태와 교육 부분에서 틀을 아직 갖추지 못한 점과 정말 큰 비라도 내리면 모든 시설물이 곧장 침수 돼 떠내려 갈 것 같은 현장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둑해질 무렵 오늘도 입가에 웃음을 떠나보내지 않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며 탐진강에서의 이틀을 마감하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아직도 쓰리지만 장흥에 몇 십 만원이라도 쓰고 와 안도감이 든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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