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기, 희망의 싹은 우리 안에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 희망의 싹은 우리 안에 있다
  • 윤영덕
  • 승인 2009.07.17 1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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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덕(전남대 5·18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가슴이 답답하다. 뒷목이 뻐근하고 머릿속이 멍해진다. 요즘 각종 언론에 보도되는 뉴스거리들을 보며 생겨난 현상이다. 신선한 소식을 접하며 유쾌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하루가 늘 이렇다. 마음을 다잡고 집중해야 할 일도 쉬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현인들의 답을 구해보기 위해 나서보지만 답답증은 영 가시질 않는다. 외면하거나 초월할 도에 이르지 못해 애써 낙관적인 희망을 붙들어 보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이명박정부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는 적나라한 현실이 되었다. 폭압적 독재 권력에 맞서 피와 땀으로 일구어 온 지난한 민주화운동의 성과가 너무도 짧은 시간에 허망하게 부정되고 있다. 광장에 모여든 수십만 인파의 촛불이 ‘민주공화국’을 부르짖으며 어둠을 밝혔지만 이미 개선가를 울리며 ‘명박산성’에 입성한 권력자에게는 높다란 성루에 올라 굽어보는 한갓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공권력에 의한 주권자의 죽음과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절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수백만의 조문 행렬과 역사적 기록을 갈아 치우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도 민주주의의 왜곡을 교정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그래서 답답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 단계를 넘어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로 진입했다고 평가됐다. 그러나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다시피 절차적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경쟁을 제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러한 규칙의 제정도 주권자의 직접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책임성을 의심 받는 소위 ‘대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제도화된 규칙에 의한 민주적 경쟁이 민주적인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불확정적이다. 우리는 한국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그러한 현상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결국 민주주의의 최소요건을 갖춘 절차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는 물론 보다 높은 수준의 참여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실현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공고화해야 할 단계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마주하고” 있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은 그 사회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수준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더욱 절절히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을 주문하는 두 전직 대통령의 호소가 너무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가슴 속 ‘울화’를 풀 답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며 투쟁으로 성취한 민주주의를 평온하게 즐기기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더 배우고 더 행동하면서, 살 맛 나는 좋은 세상을 위한 실천의 작은 성과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눔과 연대의 정신을 깨우치고, 희망의 틀을 엮어내야 한다.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보자’는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이해로부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내야 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선과 2008년 4월 제18대 총선 결과를 놓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았던 말이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던가. 가슴 속 답답함을 푸는 일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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