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 범현이
  • 승인 2009.07.17 18:5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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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만에 첫 번째 전시회 여는 작가 이혜숙(43)

▲ 이혜숙 작가.
도록을 맡기고 나온다는 작가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같이 있던 친구의 후배였다. 주름 많은 치마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시 전시장 안에서 만난 작가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마도 사람에 너무나 무심한 내 탓일 게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다. 60여점이 걸려 있는 전시장 안은 여러 사람들로 북적인다. 시간 별로, 혹은 작업의 형태별로 구분되어 있는 그림들은 잠시 전시장 안을 나갈 수 없게 서성거린다.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 여자, 교사,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아가는 관계가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도 그 안에서 작가로서 이루어 내는 열망을 가지고 지켜내느라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찌할 수 없었구나. 망연한 눈빛으로 차분차분 그의 작업을 바라본다. 한 손으로 미끈하게 말아 올린 머리 뒤끝으로 보이는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게 슬프다.

내 마음 안 나무 한그루

전시장 안을 서성거리다 한 그루 나무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다시 시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황량한 들판, 야트막한 산등성이 계단식 밭으로 이루어져 보이는 풍경 속에 머리가 뭉텅 잘려 몸통만 있는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아주 연한 초록의 새싹이 조금씩 다시 솟아나고 있는 나무다.

1999년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리가 뭉텅 잘려나간 나무를 보며 아마도 자기 자신 같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땅 속 깊숙이 박힌 뿌리와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잘려나간 머리 두 개. 생각을 할 수도 하늘을 볼 수도 없다.

▲ 이혜숙 作 「연화(蓮花)-하의도(荷衣島」

하지만 뿌리는 여전히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수액을 빨아올리고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햇빛과 바람이 온화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 속 간직하고 있는 새싹을 다시 피워 올리며 근사한 푸른 잎사귀를 상상할 것이다.

다시 무성한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무엇을 해도 마음을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상태를 수없이 보내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주변 누구도 도울 수 없다.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눈으로 하늘을 보고 새싹을 피워 올릴 일이다. 지금의 고통에서 더 깊이 내려가 끝이 보이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다. 스스로만이 할 수 있다.

▲ 이혜숙 作 「아침」

섬 - 그 안에서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다

그의 작업은 매우 시각적이다.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지도 않고 특별한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림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읽힌다.

1990년대 그림에서는 교육의 현장과 자신이 몸담았던 농촌의 현실이 그대로 보인다. <새벽>, <갈아엎는 땅>, <붉은 노을>이 그것이다.  

<갈아엎는 땅>에서는 풀 한포기 돋아나 있지 않은 황토 흙을 갈아엎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곡괭이를 들고 있는 남자의 팔뚝은 강건해 보인다. 세상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는 힘이 들어 있다.

<붉은 노을>은 물레방아 도는 황혼녘,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뒷모습이 우울하다. 두 손은 삽을 가로로 움켜쥐고 있지만 농기구도 아니고 무기는 더욱 아니다. 등에서 힘을 다 뺀 모습이 우리네 쇠잔해가는 농촌 풍경과 닮았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우울함 속의 희망일까, 아니면 작가가 바라 본 절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우울한 등의 농부가 그려져 있다. 모자 속 보이지 않은 채 발등을 향해 수그리고 있는 농부의 머리가 더 쇠잔해 보인다.

<새벽> 역시 우울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힘과 건강한 희망이 보여서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 된듯하다. 어스름 푸른빛이 도는 새벽녘, 우루과이라운드라는 거대한 태풍을 막기 위해 머리띠를 묶으며 길을 나서는 농부들의 표정.

알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해 손을 들어 배웅을 마무리하고 한 쪽에서는 미명의 두려움에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결심은 가슴에 앉혀두고 애써 무표정한 얼굴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눈가에 선연한 칼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멀리 보이는 산 아래에는 안개가 이미 뿌옇다.

▲ 이혜숙 作 「느티나무 학교」

아이들은 내 삶의 이정표


작가는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생활하던 때도 있었다. 교사가 먼저인지, 작가가 먼저인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교사이기 이전에 늘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놓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내 바람이었다”고백한다.

많은 시간을 먼지처럼 부유했다. 첫 발령을 받고 담양에서 완도 마침내 하의도 섬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아이들이 원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20년이 넘은 세월이다.

“지금 있는 하의도 섬 생활 역시 중, 고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다. 무엇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닌 아이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교육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하염없이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놓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올곧은 희망을 본다. 아이들을 흐드러지는 벛꽃나무 아래 그려두고 작가는 행복하다. 틀에 박힌 학교 안에서 생활하다가도 꽃나무 아래서면 아이들은 온전하게 더 밝고 흐드러지는 꽃송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아이들은 희망이고 사랑이다.

▲ 이혜숙 作 「노(老)목수의 꿈」

다시 걸음마를 시작하며


작가는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나 이렇게 살아왔어. 대성통곡을 한다. 작업을 할 수 없는 작가는 뿌리 뽑힌 나무를 그린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굳건하게 나무의 밑 둥을 그려도 한 번 뿌리 까지 뽑혀버린 나무는 다시 싹을 틔우기는 힘들다.

완전하게 <뿌리 뽑힌 나무>가 머리 숭덩 잘린 나무에 새 이파리를 들어내며 <생명나무>로 말한다. 뼈대만 굳건히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 이파리를 피워 올리고 가지를 벋어낼 수 있다고 도도하게 말하며 일어선다. 중심을 사이로 두고 작은 가지들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올라온다.

작가는 다시 시작한다. 싹도 새로 틔우고 새롭게 솟아난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스스로에게 투자한다. 자신이 이십대부터 꿈꾸었던 희망의 나라, 살고 싶은 나라가 오는 동안 넉넉한 자기만의 준비를 해가며 꿈을 그린다. 다시 <행복을 꿈꾸며 - 황사>, 예전의 혼란스러웠던 막연한 편안함과 행복이 아닌, 더 온전하고 아름다운 우리 모두의 행복을 꿈꾸며 한 발을 내 딛는다. 다시 이제 시작이다.

일시 : 7울25일(토)까지
장소 : 5`18기념문화관
문의 : 010-3626-2127

에필로그

▲ 이혜숙 作 「다시 시작」
그대 내 앞에 가고 / 나는 그대 뒤에 서고 / 그대와 나의 길은 / 통곡이었네 / 통곡이 너무 크면 입을 막고 / 그래도 너무 크면 귀를 막고 / 눈물이 우리 귀를 지워 버렸네 / 눈물이 우리 길을 삼켜 버렸네 / 못다간 우리 길은 통곡이었네 - 길Ⅱ. 作 이성복

단지 젊은 날 뿐이었을까.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부딪히고 깨지는 것. 이 나이가 되어도 열성으로 부딪혀 살을 깎는다. 수십 개의 화살이 되어 어둠 속 달려가 박힌다.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갈고 닦는다. 살을 베는 날카로움 속으로 가두고 아무리 작은 몸이라도 날아가 큰 무기가 된다.

지금도 무엇이 모자라 온 몸을 바다에 맡기는가.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며 형태를 고집하지 않으며 독의 성질를 그대로 간직한 작을수록 빛나는 조약돌.

절망은 늪이 아니라 무기질의 무르익은 토양이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너무 멀리 돌아온 길. 후회하지 않는다. 무너질 것도 없으니 막을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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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이 2009-07-18 11:41:55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 2009-07-17 19:58:18
읽다보니 눈물이 나요... 이제는 웅덩이에서 헤어 나온 것인지.. 아직도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인지.. 작가탐방. 늘 다음주를 기다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