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센 땅에서 풍찬노숙하는 제주도의 마을숲
억센 땅에서 풍찬노숙하는 제주도의 마을숲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7.1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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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마을숲을복원하자
⑩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숲과 한경면 용수리 절부암숲

▲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불렸던 화산섬 제주도는 아름답다. 억척스러운 제주도 여자들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없는 돌들을 걷어내 삶의 자리를 개척했고, 그 땅 위에 뿌리내린 거목들이어서 제주의 마을숲은 더 정겹다. 사진 오른쪽은 방학을 맞아 노란 비옷을 입고 섬 트레킹에 나선 대학생들.
광주공항을 출발해 20여 분 남짓 날아오른 비행기는 수평을 잡기도 전에 착륙을 서두른다. 모슬포 상공쯤에서 머리를 급격하게 왼쪽으로 돌려 하강하는 비행기에서 제주도를 내려다본다. 아름답다.

바둑판처럼 규격화된 육지의 그것과 다르게 제각각의 모습으로 구획된 경작지들의 비정형이 조화롭다. 거기에다 길이며, 밭이며, 집이며 구획이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커멓고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현무암 덩어리들. 엄벙덤벙 내키는 대로 쌓아올린 듯한 그 자연스러움이 감동을 더한다.

제주도는 신들의 섬이다. 섬을 빚어내고 한라산과 368개의 오름을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을 비롯하여 무려 1만8천의 신들이 거처하는 섬이다.

그런데 제주도의 신들은 아주 인간적이다. 대부분의 신들은 인간처럼 태어나 지독한 고난의 과정을 거쳐 신격을 얻는다. 신으로 좌정하는 것을 빼고는 인간의 삶, 그것도 아주 불행한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 제주도에는 유난히 여신들이 많다. 그들 역시 제주도 여자들의 삶과 닮아 있다. 억척스럽다.

여신들은 인간의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장한다. 삼승할망과 구삼승할망(저승할망)은 인간의 잉태, 출산, 죽음을 관장한다. 세경할망은 농사의 신이고 조왕할망은 부엌의 신이다. 노일저대귀일의 딸은 측간신으로 좌정한다. 병을 낫게 해주는 일레또와 여드레또 역시 제주도 사람들의 일상에 동거하는 여신들이다.

신들의 섬답게 제주도에는 신과 관련된 독특한 풍습이 전한다. 신구간이란 것이 그것인데,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신들이 임기를 다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운 신들이 부임해 내려오는 기간을 말한다. 신이 교체되는 이 기간은 보통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이다. 이렇게 신들이 인수인계를 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서 이사나 집수리를 하는데, 이 기간에 해야 아무 탈이 없다고 믿는다.

제주도의 토양은 척박하다. 그네들은 풍화되지 않은 용암덩어리 위에 얕게 내려앉은 화산재를 갈아엎어 씨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곡괭이를 깊이 박아 땅을 일구어보지만 돌부리에 걸린 괭이자루만 자꾸 부러졌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땅 한 뙈기라도 더 일구기 위해 보습날 깊이 박아 쟁기를 몰아보지만 돌덩어리들만 걸려 올라왔을 것이다. 그네들은 치우고 치워도 끝이 없는 그 돌덩어리들로 밭두둑을 쌓고, 집을 짓고, 담장을 쳤다.

이런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풍상을 견디며 서 있는 거목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제주도의 마을숲을 찾아간다.

▲ 엄격한 마을공동체의 규약으로 지켜온 명월리 팽나무 군락.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팽나무숲


제주공항에서 차를 빌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서쪽으로 한 시간 쯤 달렸을까. 도저히 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작은 오솔길로 자꾸만 들어가라고 한다. 그렇게 헤매기를 30여 분. 팽나무 거목들이 마을의 울타리처럼 서 있는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이른다.

마을 뒤쪽으로는 장마철 먹장구름에 몸뚱어리가 반쯤 가려진 한라산이 멀리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오름들도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팽나무 거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명월천은 마을 옆구리를 타고 흐른다.

그런데 명월리에는 팽나무가 없다. 아니 제주도에도 팽나무가 없다. 제주도 사람들은 팽나무를 ‘폭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가시나무는 ‘가시낭’이다. 아직도 중세 국어가 그대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언어학자 질리에롱(J. Gillieron)이 주창한 방언주권설(方言周圈設)이 실증되고 있는 현장이다. 정치·문화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고어가 많이 남아 방언의 특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명월리는 500년 전에 제주 고씨가 들어와 살았고 그 다음으로 진주 진씨, 군위 오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팽나무군락은 마을을 관통하면서 흐르는 명월천 제방을 따라 500m 가량 길게 조성되어 있다.

상층에는 수령 100~400년 된 팽나무와 푸조나무 노거수 100여 그루가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 채 서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산유자나무, 보리밥나무 40여 그루가 울창함을 더해주고 있다.

큰 나무는 수고 13m, 흉고둘레 5m에 이르며, 그 아래로 이질풀, 쑥, 닭의장풀, 질경이, 소리쟁이, 고사리류, 우산나물, 맥문동 등이 자라고 있다. 노거수의 수간을 감싸며 타고 오르는 이끼류와 콩짜개덩굴도 무성하게 서식하고 있다.

▲ 제주도기념물 7호인 명월대는 옛 사람들의 휴식터로 팔각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올려놓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명월리는 오랜 옛날부터 선비마을로 알려져 왔다. 폐교된 초등학교 앞에는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명월대(明月臺, 제주도기념물 제7호)가 자리를 잡고 있다. 팔각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바로 아래에는 반원형 돌다리(높이 2.3m, 폭 3.6m)가 놓여 있어 한층 운치를 더해준다.

이 숲이 지금까지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마을공동체의 규약 때문이었다. 땔감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나뭇가지 하나라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엄격한 규약 덕분에 숲이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 마을에 사는 홍종익(80)씨는 “부락에 나무가 있어야 의지가 되고, 하천제방도 보호하고, 바람도 막기 위해 심었다”면서 “향약을 해서 나뭇가지를 꺾으면 곤장도 맞고 멍석말이도 하면서 땔감이 귀한 시절에도 숲을 지켜왔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마을숲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마을에는 공동체신앙인 포제가 전승되고 있다. 포제단은 명월리 중동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50m 지점에 있는데 초헌, 아헌, 종헌, 축관, 집례 등을 선정하여 정월 초닷샛날에 정성껏 제의를 거행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는 명월대에서 동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팽나무를 할망신으로 모시고 하원당굿도 거행했다. 하원당굿은 여자들이 주관했는데 집안마다 제물을 올리고 심방(무당)을 불러다가 크게 굿을 했다고 한다.

▲ 절부의 넋이 서린 바위언덕 숲에서는 아직도 음력 3월 보름 고씨 부인의 넋을 위로하는 절부암제를 지낸다.
절부의 넋이 서려 있는 바위언덕숲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절부암숲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내비게이션의 검색버튼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절부암’을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절 표시(卍)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 찾아본 자료 어디에도 절부암이 절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졌지만 가속페달을 밟아 마을에 도착했다. 역시나 절부암은 절이 아니다. 안내판에는 ‘岩’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용수리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0.2ha 규모의 ‘엉덕동산’에는 수령이 100~200년 된 구실잣밤나무, 까마귀쪽나무, 돈나무, 육박나무, 사철나무, 박달목서, 동백나무, 녹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와 예덕나무, 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중층목과 하층목도 무성하다.

이 숲 속에 있는 절부암(節婦岩)은 1981년 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조난당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통한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슈퍼에서 막걸리를 나눠마시던 양주원(70) ·양태인(마을이장, 54)·홍제철(51) 씨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씨는 1835년에 고응종의 딸로 태어나 19세의 나이에 가난한 어부 강사철(康士喆)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화목하게 살면서 남편은 어부로, 아내는 해녀로 부지런히 일을 하며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853년 11월 13일, 남편이 죽도(현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울면서 3일 동안 찾아 헤매다가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언덕의 나무에 목을 메달아 죽었다. 그때 남편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라 아내의 시신 곁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절부 고씨의 남편에 대한 지극 정성에 감동한 것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부부의 시신은 당산봉 기슭에 합장되어 있으며, 대정군수 신재우가 정절을 가상하게 여겨 글을 짓고 비를 세웠다.

어촌계장인 홍문현(50)씨는 “본래 ‘당오름(당산봉)’에 있는 고씨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숲에 제단을 마련한 뒤로는 절부암제로 바뀌어 음력 3월 보름에 고씨 부인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전해준다. 제사 비용은 300만 원 가량 드는데, 제의가 끝나면 관광객들과 함께 제물로 올린 음식과 전복, 소라, 성게 같은 해산물을 나눠먹는다.

▲ 용수리는 원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300여년 전 마을이 생긴 것으로 알려진 용수리는 당시 마을 서쪽에 있는 '화상물'에 제를 지낸 후 사람이 살 수 있게 됐다고 전해진다. 마을슈퍼에서 막걸리를 나눠마시는 용수리 주민들 모습.

이 마을 역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엄격하게 규약을 지킨다. “처갓집에 가서 국 두 사발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땔감이 귀한 시절, 부지땡이(보릿대)를 말려 어렵게 밥을 지어먹고 살았지만, 절대로 절부암의 숲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육지의 당숲이나 당산숲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용수리는 원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300여 년 전에 마을이 생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당시에 마을 서쪽에 있는 ‘화상물’에서 제를 지낸 후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화상물은 ‘화를 면하게 해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1980년경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고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 액이나 사악한 것을 막기위한 방사탑. 시체가 마을로 떠내려 오지 못하도록 포구 양쪽에 쌓았다.
마을 앞 포구 양쪽에는 전라도 지역의 조탑과 유사한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액이나 사악한 것을 막기 위한 신앙물인데, 정교하게 쌓아올린 탑 꼭대기에는 ‘매조재기(매가 앉아 있는 모습)’ 형태의 돌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바다에서 사고가 많이 나 시체가 많이 떠올랐는데 그 시체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가마솥을 넣은 다음 탑을 쌓고 그 위에 매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어 마을에 배가 5척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전에는 뱃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배를 가진 사람들은 지금도 매달 초하루, 보름, 그믐 중 택일하여 한두 차례씩 꼭 뱃고사를 지낸다. 마을슈퍼 오른쪽 언덕아래 숲 속에는 조그마한 할망당이 있는데 마을 공동으로 제의를 거행하지는 않지만, 뱃고사를 지내기 전 그곳에 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제주도 마을들이 대체로 그렇듯 용수리 역시 해녀마을이다. 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용수리에는 148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으며, 40여 명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를 ‘잠녀’라고 하는데, 물질을 하지 않을 때도 쉬지 않는다. 용수리 잠녀들은 물질을 마치고 나면 옷을 갈아입고 밭에 나가 마늘밭을 가꾼다. 땅이든, 사람이든, 신이든, 마을숲이든 제주도에서는 모두가 억척스럽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억센 땅에서 풍찬노숙하고 있는 제주도의 마을숲이 눈에 선하다.
/김경대 기자·정명철 전남대 문학재학 박사과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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