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들’
  • 범현이
  • 승인 2009.07.10 2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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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작가 권승찬(37)

▲ 권승찬 작가.
몇 년에 걸쳐 우연히, 자주 자리를 같이 한 작가이다. 후배 작업실에서, 대인시장 막걸리 집에서, 전시회 뒤풀이 등등. 기억에 남아 있는 작가의 이미지는 매우 경쾌하다. 아주 우울한 이야기마저 작가 앞에서는 순식간에 뒤집어져 바로 웃음을 재생산 해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가을, 머리에 온통 산국(山菊)을 꼽은 채 막걸리에 취해 춤을 추던 선술집. 그 모든 것을 저장하듯 바라보고 있던 망연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마 작가는 기억도 못할 것이다.

그날 밤, 가을비는 추적거렸고 작가는 ‘나, 우울하다니까’를 부르짖으며 계속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몸짓으로 춤을 추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비엔날레 프로젝트가 끝난 며칠 후 대인시장의 한 술집이었을 게다.

이 여름. 다시 작가를 우연히 만났다. 피해갈 수 없이 또 대인시장에서다. 약간 높은 문턱을 들어서자마자 웃음을 띠며 폴라로이드 플래시를 터트린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자 손바닥 만 한 폴라로이드 인화지 안에서 시간이 모습을 보인다. 나 여기 있어. 오늘이 네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야. 가장 기억하고 싶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을 들어낸다.

‘당신 생애 기억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아득했다. 누군가 갑자기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와 같다. 기억나는 시간,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던가? 순간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핏줄과 핏줄들이 서로 얽히고 순간 풀어져가며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하도록 하얘져온다. 멈출 수도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기억의 모든 순환 고리가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작가는 ‘당신 생애 기억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질문을 던지며 웃으며 다가온다. 아직 기억해내지도, 기억나는 순간의 흔적을 찾지도 못했는데 다음 질문을 던진다.

▲ 권승찬 作 「당신생애가장기억남은시간은」

하얘졌던 머릿속이 점점 기억의 미끄러운 미끄럼틀을 타며 온전하게 돌아오며 회생을 던진다. 기억나는 시간. 행복한 것이든, 불행했던 것이든,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든,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일부분임을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기억은 자신이다. 시간을 멈출 수 없이 흐르는 공간과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며 흐르는 그 안으로 매몰되고 새로운 새싹을 거느리는 기억은 바로 자신이다. 온전하게 자기 것이다.

작가는 다시 묻는다. 기억나는 순간을 이제는 선명해진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 날짜를 기억하라 한다. 한숨을 쉬듯, 더 이전의 나도, 이후의 나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늘.. 날짜를 힘주어 적는다. 당신 생애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당신의 남아 있는 생애 중 가장 젊은 날이다.

▲ 권승찬 作 「모여라 꿈동산」

수화(手話)로 처음 만난 세상


대학을 졸업한 그가 가장 처음 세상을 향해 내민 언어는 수화였다. 아직 너무나 어리고 약해서 들을 수도 읽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없어 수화로 옹알거렸다.

‘안녕하십니까. 권승찬 입니다.’ 수화로 말을 건네자 세상은 그를 향해 반응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수화는 언어를 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통의 도구로 만들어졌고, 나 역시 소통의 방법을 찾기 위해 수화로 손을 내밀었으니 수화는 어쩌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말한 첫 번째의 언어이다”며, 작가는 “명함으로 만들어진 수화는 결국 내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명함을 내밀자 사람들은 작지만 내게 반응해 왔다”고 고백한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워 먼지처럼 떠돌아다녔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2007년에 의재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안양의 스톤앤워터, 어느 한 곳 짐을 다 풀 수 없는 시간과 공간들이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내 민 손을 잡아주는 세상의 반응에만도 감격하고 충분히 행복하다.

2009년 대인아트시장 아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작가는 다시 들어왔다. 예전, 세탁소가 있었던 작은 골목을 들어서면 엄마다방이 보이는 바로 앞 건물 안으로 당당히 머리를 내밀며 들어왔다. 다시 길을 떠나는 유목민이 되었다.

▲ 권승찬 作 「THANK-YOU」

시장 안에서 다시 수화를 넘어 풀라로이드로 기억을 인화해


“시장이란 공간이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내 기질이, 나만의 세계에 푹 파묻혀 지내는 데 익숙한 시간들이 대인시장 안에서는 오픈 작업실로 보여주어야 했다. 내가 나를 달래고 익숙하게 눈빛 짓는 법을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시장은 기억 속의 옛 시장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오가는 곳. 서로 흥정을 하며 에누리를 주장하는 곳.

▲ 권승찬 作 「NAW-IN-DEAIN-MARKET」

언제 어디서나 인정이 넘치면서도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들어가면 곤죽이 되도록 치열하게 싸우는 곳. 뻥튀기 장사가 뻥이야를 외치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곳. 소리꾼, 사진사가 있는 곳. 야바위가 진실을 외치며 난무하는 곳. 이 모든 것들을 다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주고 웃는 곳.

그는 대인시장 골목 안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기억을 묻는다. 가장 소중했던 시간을 수집하는 것이다. 사진가도 아니고 인화된 사진으로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라는 기억을 인화해 현재를 흔적으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한 장 씩 찍어 벽에 붙이던 작업이 이제는 한 쪽 벽면을 기득 채워간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 시간들이 그의 작업실 안으로 옮겨온 셈이다. 작은 작업실 안, 기억들이 붕붕 떠다니는 그의 작업실은 온통 두둥실 공간인 셈이다.

공간을 수집한 작가는 실시간 지도 검색 서비스인 ‘구글어스’와  ‘야후 라이프 맵’을 통해 세계로 분해되어 전송된다. 그만의 수화는 이제 세계적인 언어가 되어간다.
문의 : 016-786-5190

▲ 권승찬 作 「자취의 현대사-짬뽕 스페셜」

에필로그


내 살아온 생애 동안 가장 기억나는 시간은 언제일까. 사람으로 살면서 모두들 겪는 일들은 아니길 바란다. 아니, 어쩌면 가장 평범한 일. 사람이 살면서 겪는 외로움이나 고통 보다는 기뻤던 날이 아닐까. 각각의 서로 짐작조차 못할 날짜와 시간들을 써보지만 결국은 모두가 비슷한 일들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날짜 하나씩을 쓰고 다시, 하나씩 달력에 표시를 해가다 보면 마침내는 달력의 모든 숫자에 동그라미가 쳐져 일 년 내내 행복한, 혹은 아주 슬픈, 기억하고 싶은 날들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둥근 지구에서 서로를 받쳐주며 둥그렇게 모아져 살아야 할 테니.

갑자기 고개를 든 흔적에 스스로 베인다. 기억 속 몇 마장 잠깐 돌고 온 것 같은데 옷자락에 쐐기풀이 잔뜩 묻어있다. 여기저기 내가 잔뜩 구겨져 있다. 슬픔을 못 견딘 내 아픔이 서로의 몸을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몸 밖의 시간들을 벌써 읽는다. 어느 날 무심히 달고 온 가시 풀들이 불러낸 삶의 문양들. 지나가고 나면 깊이 찔린 것일수록 더 손이 간다.

▲ 권승찬 作 「자취의 현대사-행복한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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