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마을을 지키고 마을은 숲을 아끼고
숲은 마을을 지키고 마을은 숲을 아끼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7.09 1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 마을숲을 복원하자
⑨전남 화순군 동복면 연둔리 숲정이

유년시절을 더듬어 보면 어느 누구라도 숲의 매혹과 물의 공포가 추억의 한 토막을 장식하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로 나무숲에서 뛰놀고 시내에서 자맥질을 하며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고 탯자리에 대한 애정을 키웠던 그 시절…. 지금은 흔적마저 가뭇해 되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지만 고향이 그리운 이라면 둔동(屯洞)마을 숲정이를 찾아나서 보자. 숲정이는 누구에게라도 친근한 기시감을 선물한다. 

동복천 따라 조성된 보안림(保安林)

섬진강 지류인 동복천을 따라 조성된 둔동마을 숲정이는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을숲이다. 숲정이는 마을근처의 우거진 숲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둔동마을은 동복천이 실어 나른 고운 흙이 마을 터를 만들어 조선 초기에 형성된 마을로 숲정이는 다양한 보안림(保安林)의 기능을 위해 조성됐다. 이 숲은 둔동마을로 들어가는 연둔교를 건너면 바로 이어지는데 동복천 양쪽으로 700m에 걸쳐 230여 그루의 노거수가 늘어서 있다.

▲ 섬진강 지류인 동복천을 따라 조성된 둔동마을 숲정이.

느티나무, 호랑버들, 왕버들, 팽나무, 서어나무, 참느릅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노거수를 비롯해 수양버들, 벚나무, 무궁화, 이태리포플러, 뽕나무가 서식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마삭줄, 왕주똥나무, 거북꼬리풀, 조릿대 등 120여종의 식물이 서식한다. 흉고둘레 3m 이상인 노거수들은 수령이 500년에 이르러 마을이 형성되던 시기에 식재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나무들도 대부분 50~2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둔동마을은 군인들이나 역민들에게 경작하게 한 둔전이 있던 곳이라 하여 ‘둔골’이라 부르다가 뒷날 한자로 표기하면서 ‘둔동’이라 했다고 전해지며, 마을주민들은 동복천의 물이 이곳에서 모인다 하여 ‘둔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1600년경 둔동 앞들이 조성되면서 길이 250m, 폭 15m로 자연석을 쌓아 구축한 둔동보가 있는데, 동복천 물이 모이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직선거리로는 100m 남짓하지만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하기 위해 구불구불 사선으로 쌓으면서 보의 길이가 길어졌다.   

숲정이는 무엇보다 둔동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둔동보를 기점으로 윗새봇들, 아랫새봇들이라 불렸던 농경지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조성된 둔동보는 매년 개보수가 필수적이었다.   

▲ 산책로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 한 마리가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는 길손을 경계하듯 쳐다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못자리를 하기 전인 4월초에 울력을 하여 보를 정기적으로 다시 쌓았는데, 1마지기당 2개씩의 돌을 모아 가장 큰 돌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고, 그해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을 소잔등에 태워 축복해주는 풍속도 전해왔다고 한다.

숲정이는 제방을 유지하는 한편 큰물이 질 때 큰 나무 밑 중간 중간 7개의 방천(防川)을 쌓아 유속을 줄이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보 관리는 마을의 가장 중요한 대사였으며 경작자 중에 선발된 보 감관(監官)에 전권을 위임해 필요에 따라 마을사람들을 울력에 동원할 수 있게 했다.

마을의 역사를 대학노트에 꼼꼼히 기록해온 옛 이장 김점칠(80)옹은 “마을 울력은 1988년까지 계속되다가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재래식 보를 시멘트 보로 개축하고는 사라진 풍속이 됐다”면서 “무거운 돌을 날라 쌓는 대신 시멘트를 바르면서 보의 고전미가 사라지고 흉한 모습만 남았다”고 아쉬워했다.  

마을 사람들은 둔동보의 제방을 단단히 하고 홍수로 인해 농경지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요즘도 매년 봄이면 산에서 묘목을 캐다가 숲정이에 옮겨 심는다. 지금은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유량이 급격하게 줄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가장 좋은 쉼터인 숲정이를 가꾸는 일에주민들이 쏟는 정성은 요즘도 대단하다.  

고목 자태 하나하나가 훌륭한 미술품

▲ 세월의 켜가 빚어낸 고목의 자태는 하나의 미술품을 보는 것 같다.
숲정이는 500여년을 내려오면서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토속신앙과 결부돼 본디의 구실 이외에 자못 신령스러운 존재로 자리 잡았다. 마을주민들의 울력을 통해 가꾸어져 온 탓에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는 여전하다.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지금도 이 숲이 마을을 보호해 주고 있어 빈농이 없다고 믿고 있으며, 2002년에는 생명의숲국민운동,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주관한 ‘아름다운 마을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양 갈래로 줄지어 선 숲정이의 나무숲은 나무와 나무사이로 훌륭한 산책로를 만들었다. 길손을 유혹하는 굽이진 숲길은 6월의 녹음으로 건재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세월의 켜가 빚어낸 고목의 자태는 훌륭한 미술품을 보는 듯 고매한 아취를 뿜어낸다.

숲정이는 고목의 나이테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여순반란 사건 때는 국군이 모후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숲을 훼손하려 하기도 했고 6.25전쟁 때에는 빨치산과 인민군이 마을에 자주 숨어 들어오자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양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하지만 숲정이의 명성이 높아져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숲 훼손을 걱정하는 마을주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마을주민들은 국무총리를 지낸 당시 전남도지사 고건 씨 등 유명 인사들이 가족들과 함께 하루나 이틀 쉬어가곤 하던 숨겨진 명소였는데 여기저기 소문이 나면서 번잡한 쉼터가 돼 버렸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최근에는 결혼을 약속한 선남선녀들의 웨딩촬영 명소로, 둔동보를 찾는 강태공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방문객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 더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숲정이와 함께 풍상을 헤쳐온 둔동마을은 70년대까지만 해도 90세대 500여명이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40여세대 100여명의 주민들이 숲정이를 벗 삼아 살아가고 있다. 둔동마을 숲은 마을을 지키고 마을 사람들은 숲을 아끼고 보호하며 앞으로도 서로를 위해 남은 삶을 의지할 것이다. 마을숲을 가꾸고 보존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도 방문객들의 몫이 아닐까. /김경대 기자·정명철 전남대 문화재학 박사과정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