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폐교로 ‘등교’한다
나는 오늘도 폐교로 ‘등교’한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6.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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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작은학교’ 찍는 김판용 작가

‘학교만큼 재밌는 곳이 있을까’라는 말에 뜨악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학교는 살풍경하고 삭막한 곳이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여름철 납량특집영화 소재로 롱런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요즘 우리 아이들이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우리 부모세대에게 학교의 의미는 돌아가고 싶은 유년의 꿈 그 자체였다. 학교에는 온갖 재미난 이야기들이 숨겨있다. 학교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라. 전설 없는 학교가 없으며 사연 없는 학교가 없다. 학교의 전설은 들으면 들을수록 바다속 맷돌처럼 끊임없이 쏟아진다.

김판용 작가(전주 아중중학교 교감)

전주의 김판용(전주 아중중학교 교감)씨는 이런 학교의 꿈과 추억,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도회지의 큰 학교가 아니라 막 스러져가는 학교, 폐교되기 직전의 학교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러길 자그마치 5년째이다.

5년 새 3백여 곳이 폐교...기록이나 자료없어

김씨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2003년 전북교육청에 근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우연히 자료를 찾다가 근 5년 내에 전북권에서만 폐교된 학교가 3백여 곳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러한 폐교에 대한 아무런 자료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결심했다. ‘내가 한번 이 학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자고’

2005년 1월부터 전북교육청에서 발행하는 <푸른교육>에 ‘작은학교 이야기’를 싣기 시작했다. 전북에 있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시작했다. 한 두 차례 중학교를 싣긴 했지만 대부분 초등학교였다. 아직 폐교되지는 않았지만 폐교가 눈에 뻔히 보이는 학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취재도 하고 이야기도 끌어 모았다. 그렇게 발품 팔아 취재한 원고와 사진들은 한 달에 한번 ‘작은 학교 이야기’로 탄생되었다. 이제 막 역사의 뒤안으로 자취도 없이 스러질뻔한 작은 학교들이었다.

“학교 취재하다보면 참 재밌어요. 그 옛날에 사셨던 어르신들 이야기 듣다보면 정말 재밌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점은 세상엔 사연없는 학교가 없고, 이야기없는 학교가 없다는 거죠.

무주에 삼방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무주군 적상면의 삼유리와 방이리 사람들이 돈을 걷어 세운 학교예요. 그런데 이 학교를 가려면 아이들이 적성산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일찍 집에서 나선다고 해도 1교시가 끝나야 도착했던 거예요. 그래서 숙제검사를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오지라서 울고 왔다가 떠날 때 인정 때문에 다시 울고 간다는 교사들의 사연이 어렸죠. 결국 2007년 2월 결국 폐교됐습니다”

학교이름을 보면 그 당시 사회상도 보인다. 때론 학교이름이 당시의 ‘실세’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정읍 태인의 오봉초등학교.

이 학교는 실제로 궁산리에 있다. 그런데 학교이름이 ‘오봉’이 된 까닭은 학교를 세운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학교이름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오봉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예는 비근하다.

▲ 군산어청도초등학교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건너와 도미를 잡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을 벌었고, 그들의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번듯한 학교를 세운 것이다. 20년간 일본인 교장이 머물 정도로 힘도 있었다. 섬의 사정만큼이나 학교도 곤궁해 전교생이 14명이다.(설명-김판용)

▲ 군산 비안도초등학교 한달에 여객선이 한두 번 밖에 안다니는 비안도는 학교가 유일한 세상의 통로이다. 1942년 고군산공립심상소학교 비안도 간이학교로 출발해 한때 두리도에 분교를 둘 정도로 성장했고, 전교생이 150명이 넘은 적도 있었으나, 현재 1학년과 3학년은 한명도 없다. 교직원 7명에 전교생 7명, 그야말로 가족과 같은 학교이다. (설명-김판용)

학교는 그 전체가 하나의 인문학 텍스트다. 학교가 배움을 전하고 받는 곳 이상이다.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가장 빨리 보여주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다. 그래서 빨리 사라지기도 하고 빨리 세워지기도 한다.

“고창의 동호초등학교는 1940년 개교당시 갯벌을 막아 설립된 삼양농장에서 땅과 건물을 모두 제공해서 설립한 학교예요. 이후 농장이 염전으로 변하면서 염부들이 가정을 꾸리면서 교세가 확장돼 고창 최고 엘리트학교로 성장했죠. 하지만 지금은 염전도 쇠퇴하고 그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서서 현재는 전교생 23명의 초미니 학교로 전락한 것이죠.”

‘나 홀로 입학생’에게 정말 필요한 것

해마다 입학철이 되면 매스컴에서는 전교생 10명도 채 안되는 ‘작은학교’를 소개하곤 한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학생들과 교사의 모습, 아담한 교사(校舍)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러나 5년 동안 작은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주의깊게 보아온 김씨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것은 20여년이상 교육계에 몸담아 온 교육자로서의 고민이기도 하다. 나홀로 입학생은 혼자서 학교의 모든 풀서비스를 받기 때문에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사회성과 적응력을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설득하고 때론 타협하는 능력을 배울 기회를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학부모들이 그 마을의 작은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고 도시로 보내려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학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 정읍 회룡초등학교 1963년 주민들이 땅을 내고 쌀을 갹출하여 정우초등학교 회룡분교를 유치하고, 그후 2년 동안 몸집을 불려 본교로 승격됐다. 1974년에는 482명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고,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정읍에서 상인들이 몰려올 정도 흥성거렸다. 현재 전교생 9명이 교직원 8명과 생활한다. (설명-김판용)

▲ 정읍 백암초등학교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백암천 모래밭에 1955년 천막교실을 만들면서 학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후 주민들은 땅을 내고, 건물을 지어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교내에 있는 늙은 왕버들나무는 이 곳이 냇가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977년 700명이 넘게 다녔으나 현재 14명의 학생들이 가족처럼 생활하고 있다. (설명-김판용)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예요. 그것은 건물하나 달랑 없어지는 그런 의미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입학생이 없으면 당연히 폐교가 될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그것을 마냥 보면서 안타까워하기만 할 것이냐.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폐교화를 막으면 됩니다.

폐교직전에 있는 작은학교도 특성화 시켜서 경쟁력이 있는 학교로 만들면 됩니다. 그 대표적 성공사례가 진안의 조림초등학교예요. 폐교위기에 처해있는 이 학교를 살린 것은 아토피 학생들의 치유공간으로 만든 아이디어예요. 하지만 이것은 학교 자체만으로는 절대 안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학교와 지자체가 하나가 되어 함께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한다는 겁니다. 물론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민관이 함께 협력해야한다는 겁니다. 학교의 문제니까 학교에만 떠맡긴다? 안되는 일이죠. 학교가 살면 그 마을이 살아납니다. ”

학교가 살아나면 마을이 살아난다

물론, 모든 폐교를 다 살릴 수는 없다. 그중에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학교들을 선별해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학교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 마을이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초등학생의 뒷모습은 왠지 안쓰럽고 외로워보이죠. 하지만 여럿이서 왁자지껄 떠들며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무엇이 느껴지나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5년간 전북의 초등학교란 초등학교는 샅샅이 찾아다녔다. 어디에 무슨 학교가 있으며 어떤 사연을 안고있는지 환히 꿰고 있다. 전북의 초등학교 이야기를 김씨만큼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자 사진과 함께 학교의 이야기를 싣자는 출판사들의 의뢰가 여기저기에서 들어왔다. 그 자체로 충분히 인문학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편집자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욕심나는 아이템’이었던 것. 여기에 한가지 더 욕심을 보태자면 그 범위를 전북권이 아닌 전국구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 진안 연장초등학교 천주교 한들성당 안에 1933년 해성사숙이라는 서당이 들어선 것이 이 학교의 모태였다. 그후 1941년 일제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땅과 건물을 모두 빼앗기고 문을 닫았으나, 해방이 되자 화려하게 부활했다. 1971년에는 480명이나 되는 대식구를 거느렸지만, 재학생 10명으로는 버티기 어려워 2009년 2월 문을 닫았다. (설명-김판용)

전국의 초등학교를 취재할 욕심도 열정도 있었다. 그러자면 교육청의 협조가 필요했다. 김씨가 5년 동안 전북의 초등학교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취재할 수 있었던 것도 교육청이라는 공직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취재협조를 요청하는 글과 그동안 취재한 자료와 사진을 첨부해서 교육부에 보냈다. 그러나 해를 넘기도록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꼭 제가 아니어도 좋아요. 그 지역의 사라져가는 폐교와 작은학교들에 관심을 갖고 기록으로 남기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걸로 된 거죠.”

김씨는 말 그대로 ‘작가’다. 사진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다. 젊은 시절, 황토현 문화연구소를 세우고 문화운동을 했다. 답사를 시작하면서 사진 찍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97년부터 우리꽃,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요즘 해외까지 가서 출사를 하거나 일부러 먼 곳을 찾아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은데 좀 안타깝습니다.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내가 가장 자신있는 곳을 찍으면 됩니다. 무엇을 찍었느냐보다 왜 그렇게 찍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할거리’를 주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김씨의 말대로 그의 사진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단짝친구, 운동장, 선생님 그리고 그 옛날 함께 살았던 이웃들... 그리고 잊혀져가고 있는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선샤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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