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를 가다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를 가다
  • 전고필
  • 승인 2009.06.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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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아픔 짓물린 현장을 찾아서

지난 주말 광주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목포로 가서 9시 출항하는 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4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배를 타고 제주로 가서 4·3의 아픔이 짓물린 공간을 다녀오기 위함이다. 제주라는 말에는 바람과 돌이 들어 있고, 억척스러운 해녀 어머니들의 삶이 버무려 있지만 그보다 육지부 사람에게는 이국적인 요소들이 먼저였다.

무심한 관광객들은 살기위해 바다에 나가야 했던 해녀들의 물질을 그저 싱싱한 바닷것들을 먹을 수 있는 기회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어느 마을인가는 해녀촌이라 부르며 남자들이 없는 그 마을의 사연은 묻지도 않고 그녀들의 노동을 쉽게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금기와 억압으로 인한 역사의 빗장이 제주의 속살을 시커먼 용암굴 안에 가둬버렸던 나날이었다. 1988년이었던가, 학과의 실습여행에서 가이드에게 물었다. 왜 4·3의 역사는 말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가이드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조심하라고 도리어 나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 그래도 희망은 미래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평화에의 열망이 여기 담겨 있었다. 사진은 제주4·3평화기념관 전경.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이란 시와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노래가 불리던 시절이었다. 1978년 소설가 현기영선생의 <순이삼촌>이 발간되면서 불편한 진실의 물꼬가 트였고, 87년 6월 항쟁 이후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드높아 지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가이드는 입을 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관광을 안내하는 제주의 가이드 중 4·3분야의 전문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세월이 흘러 제주는 1999년 12월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이 법에 근거하여 3년간의 자료수집 및 조사를 벌여 진상 보고서를 확정하고, 국가 권력의 잘못에 의해 벌어진 참혹한 피해에 대해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제노사이드, 광주만의 일은 아니었다. 힘없고 연약한 민중들은 권력 앞에서 한없이 무너졌고, 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던 사례들은 전 국토에 넘쳐났던 피의 시절이었다.

제주시 봉개동의 거친 오름으로 갔다. 2008년 평화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4·3의 역사를 담는 그릇으로 설계된 이 공간에는 위령제단과 위령탑과 전시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체계적으로 분류된 전시자료들은 그 고통스러운 역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했다.

▲ 새기지 않은 이름. 아직 4.3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밝혀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빛을 찾고 억울함이 가실 때, 그때 이 비에 이름을 새길 것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 곁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문구가 있었다. 정명. 제대로 된 명칭을 아직 담아내지 못하는 가운데 4·3특별법이 위헌이라고 헌법 소원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 현실이 참담하게 다가오는 현장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랑쉬 동굴의 참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다랑쉬 오름 근처의 마을에서 동굴로 피신한 이들을 발견한 토벌대가 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질식시켰던 처참했던 현장이 아비규환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공원의 위쪽에는 위패 봉안실이 있었다. 마을별로 정리된 공식적으로 신고 확인된 1만4천여 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었던 대저 권력이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근보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500여명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 어린 아이들의 무덤이 있는 북촌의 너븐숭이에 가기 위함이었다. 사과상자만한 돌무지들이 널을 이루며 10여 기가 있었다. 저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두 눈을 부릅뜨며 하늘을 보게 했는지 참담하기만 한 마음이었다.

아직 실전 경험이 없는 군인들의 사살훈련에 저 영혼들이 스러져 간 것이었다. 위령비에 묵념을 올리고 침묵의 시대 소설로서 진실을 얘기했던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 문학 기념비를 둘러보았다. 분루 속에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은 일제의 만행이 남아있는 가마오름의 평화박물관으로 향했다.

일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본토에서의 전쟁을 대리할 공간으로 이곳 제주를 주목했다. 그리고 368개의 오름 중에서 113곳에 진지를 구축했고 그중 가마오름을 총연장 1.2km에 달하는 땅굴을 파고 병력이 주둔한 것이다. 그 노동은 오로지 징용당한 한국인에 의해 이뤄졌으며, 오늘 이곳을 운영하는 이는 이성찬이라는 강제노역자의 아들 이영근씨였다. 식민의 슬픔을 다시 되새기고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이 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박물관을 열게 한 것이었다.

▲ 죄명조차 모른채 죽임을 당하고, 6년여 동안 드러내지 못하고, 60여년 동안 쓰지 못했던 아픔은 끝내 올라가지 못하는 조기로 상징된다.

따뜻하고 섬세한 안내를 받으며, 모슬포에 있는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 백조일손지묘로 향했다. 학살을 자행하고도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한 것은 비단 이곳만의 일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잡혀온 대정과 한림지역의 주민 212명은 재판과정도 없이 바로 섯알오름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리고 6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엉켜진 백골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고혼을 모신 공간이었다.

일제, 4·3, 6·25. 기쁨은 모래알보다 작았고, 슬픔은 모래알만큼 많았다는 제주사람들의 삶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가운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돌아오는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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