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놓다
마음을 놓다
  • 범현이
  • 승인 2009.06.19 20:3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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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는 작가 박하용(45)

▲ 박하용 작가.
작가를 만나러 가기 전 날, 강원도 횡성에 있는 휴양림에 다녀왔다. 온통 초록바람 뿐인 그곳을 맨발로 걸으며 아직은 살아있음을 감사했다. 탱탱하게 당겨지는 다리의 느낌 속에서도 바람을 가르며 그냥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른 아침 작가와 약속을 해두고 거의 가수면 상태에서 운전을 하며 만나러 간다. 이정표를 지날 때마다 정말 잘 가고 있는 것인 지 생각이 채 들기 도 전에 이미 길은, 지나가 버린 길이었다.

대학시절, 정말 좋아하던 친구들이 그곳에서 살았었다. 가족 중 일부는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지만 마음을 한 번 떠난 그곳은 아주 가끔씩 일로 인해 찾아가는 일 외에는 굳이 찾아갈 일이 없었다.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며 아파왔다. 우리가 소주로 날을 새며 기다렸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 우리가 꿈꾸던 것들은 이제 이루어졌을까.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한 조각의 마음도 남아있지 않다.

바라다보니 연꽃의 무더기가 보이다

▲ 박하용 作 「별바라기」.
작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나주다. 격자창을 가진 넓은 다다미방 작업실. 작가는 그곳이 예전에 요가를 하는 곳이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작업실 안으로 열어 놓은 창 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돌아다닌다. 휭. 소리가 날만큼 많이 휘돌아간다. 잠깐의 돌아나가는 바람이 미시령 꼭대기에 서 있는 소리를 낳는다.

한 때는 삶의 시간 모두가 바람인 적도 있었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은 마음. 어떤 위로를 받아도 스스로 치유되지 않는 아픔. 작가는 말한다. “생각의 근원이 점점 깊어졌다. 나는 왜 그림 아니면 안 되는가에서 의문이 출발했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불화, 탱화이다.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고 불화와 탱화를 만나기 전까지는 열심히 서양화를 그렸다. 민족정신의 근원을 찾아가기 전의 이야기이다.

“민중미술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쪽은 늘 허허로웠다. 그림이 단지 메시지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가지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났다”는 작가는 “우리 고유의 민족정신을 찾아가기 위해 민족종교라 일컫는 천도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귀띔한다.

의문이 시작되자 방법은 하나였다. 의문을 스스로 풀어가는 것이다. 탱화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물이 스미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불화를 눈물로 만나다

▲ 박하용 作 「농부별」.
1994년, 통도사에서 열린 불화전에서 작가는 대성통곡을 한다. 낯설음 없이 스며들었던 불화들이 온전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쌓여져있던 미진한 억눌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세상을 향해있던 마음을 눈물로 쏟아낸 것이다.

민화와 불화, 탱화까지 그가 미술운동 안에서 차용해 썼던 모든 것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박정자 선생님 문하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낸다. 문하생이 된 것이다. 일정 시간이면 출근해 가장 기초적인 줄긋기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흡수한다. 2001년에서 2004년까지의 시간이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공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9시에 출근해 밤9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엎드려 불화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초벌기 부터 망설이지 않고 나를 버려가며 한 공부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늘 같은 그림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어제 그림 그림과 오늘 그린 그림이 분명히 달랐다. 선이 달랐고 색채가 달랐다. 마음이 가는 선, 끊어지는 선들을 서로 이어가며 내 마음의 조각들도 저절로 이어졌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잡았을 때 작가가 보는 세상은 분명 달랐다. 예전의 산의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다른 선들과 모양으로 작각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독특한 눈으로 작가의 눈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되고 구성해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하심(下心)으로 세상을 보다

▲ 박하용 作 「씨드림」.
“나를 버려가며 그림을 그리고 세상을 본다”는 작가에게 세상은 그냥 살아가며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한 무더기일 뿐이다.

불교 안에서 그림을 풀어가려 생각하자 그는 겸손해진다. 마음 안의 것을 다 풀어놓으면 더 작아진다. 불화를 만나가 전의 그의 작품도 불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97년 작인 <씨드림>. 처연한 슬픔이 다가온다. 등이 적당히 굽은 어머니의 마음은 뗄 수 없는 그림자보다 더 큰 형태의 소망이 있다. 손바닥만 한 붉은 밭들 사이에 피어있는 소망이다.

자식들에 대한 소망, 한 뼘이라도 내 땅을 갖고 싶어 하는 소망 들이 한 해 두 해, 달이 모양을 변형해 갈 때까지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소망이다. 어머니가 붉은 황토 위로 씨를 뿌리는 것은 소망의 씨앗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삶 그 자체이다.

96년 작 <별바라기>. 아이를 업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 위로 세상의 모든 별들이 보인다. 등에 업혀 있는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별이다. 바람 짙은 눈빛으로 어부바하고 있는 아이의 손을 별을 잡으려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업힌 채 일어서려 한다. 아직은 할아버지 등이지만 곧 자라서 아이는 별을 찾아갈 것이다. 소망의 별을 찾아 아이는 할아버지를 발판으로 곧 길을 나설 것이다. 찬란한 별이다.

98년 작 <농부별>. 그림 전체가 빛나는 별이다. 삽을 뒷짐 지듯 들고 있는 마디 굵은 손을 가진 농부는 우리의 밥을 만들어 내는 별이다. 밥별... 일생을 살아가며 가장 소중한 우리의 먹을 것, 밥을 만들어내는 농부는 가장 소중한 밥별이다. 북극성 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별이다. 작가의 의식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97년 작 <칠성>. 우리 눈에 익숙한 야트막한 야산과 그 위로 빛나는 북두칠성이다.북두칠성 별에는 갖가지 소망이 보인다. 사람도 있고 돈도 있고 씨앗, 연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윤회도 보인다. 하늘은 지문처럼 온통 흔들리며 움직이고 빛나는 노란 별들을 향해 은하수는 쏟아져 내린다. 은하수가 쏱아 지는 곳은 야트막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산, 인간의 마음속이다.

 

▲ 박하용 作 「칠성」.

물을 닮아가며 물로 살아가고 싶어

높은 곳에서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마음을 배우고 싶어 한다. 물의 마음을 그리고 싶어 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작가가 깨달은 것 단, 한가지이다.

올곧은 마음으로 지금까지 걸어왔고 대상이지만 세상의 전부를 담고 있는 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타자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얻어진 겸손한 결과임을 안다. 무거운 것들을 쌓아놓지 않고 녹아들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에는 불성이 담겨있다.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가 문제이다”
작가는 이미 강을 건너 물을 마음으로 담아가고 있다. 스스로 스며들고 있다.

문의 : 011-610-2734

에필로그


▲ 박하용 作「선재동자 (부분)」
건네줄 것이 내 목숨 외엔 없다 / 폭우 속에 내 몸 바다 절벽으로 밀어 세웠다 / 때론 비척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대패로 밀었다가 / 이따금 해찰하는 중심을 잘 벼린 칼로 베어버렸다가 / 못난 사유 몇 무더기 아무렇게나 / 성깔진 바다 속에 꼬라박곤 했다 / 태풍의 눈 속으로 관념 없이 들어설 때가 많았다 / 바다만큼 내 껍질 벗기는 일이 쉽지 않아 / 그 속으로 들어가 칼을 쥐어주기도 했다 / 바다의 거친 칼 손이 / 마을의 문빗장을 따고 기세 좋게 들고 날 때 / 온 몸을 벼르고 그의 아가리 속에 / 순순히 머리 들이밀 때가 있다 / 태풍을 미리 감지한 심해의 눈이 / 제 살에 칼집을 넣고 미리 몸을 찧는 것처럼 / 상처로 상처를 에 / 예감하는 일 / 바람의 숫돌에 / 검은 비가 세상을 한바탕 베고 있다 / 양철 지붕처럼 들썩이며 / 검은 바다로 간다 / 중심은 끄떡도 없는데 / 주변이 먼저 알아 채는 것 / 한통속인 주변과 내가 태풍보다 먼저 해방되는 사유 / 과연 삶일까 죽음일까 - 정영주. 태풍의 눈


그동안 살아온 세상은 방 안, 바라본 세상은 창 밖. 이제껏 아프기만 했다. 내게 아름다운 날은 있었던가. 기쁨과 슬픔, 한 장 한 장의 행간에 절망과 열망을 실어 머나먼 시간의 바다, 돌이킬 수 없는, 결코 머무르지 않는 빛의 물살 속으로 보낸다.

내 젊음의 온갖 음영까지. <없다>하고 나를 버리고 그대가 떠난 후 쓸쓸할 때엔 일부러 소리를 내 읽는다. 닫혔던 입의 아우성이니, 쉬지 않을 아우성이니 열린 채 아무른 입.

▲ 박하용 作「수월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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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이 2009-06-21 15:53:41
한달전부터 일주일 한 번의 기사가 이주일에 한 번으로 조정이 되었답니다. 지면상의 문제도 있고해서 있었던 일이지요. 그런데 결국은 지면에 게재가 안되는 웹상으로만으로도 탐방을 원하는 작가가의 목소리가 높아서 저도 그렇게 하자는 쪽으로 다시 결정을 했답니다. 다시 일주일 한번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비둘기 2009-06-20 21:49:34
몇주간 불규칙하게 올라오는 기자님의 글을 보면서 많이 불안했답니다.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 지, 어디가 많이 아프고 있는 건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긴 것인지... 만약 그랬다면 책임감 없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인 지.. 많이 실망하면서도 어떤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다시 올라오는 기사를 보면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다시는 마지막이 결국은 오겠지만 이해가 안되는 이런 일들이 이제는 없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