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밖으로 뛰쳐나와 ‘현재’를 살다
소설 밖으로 뛰쳐나와 ‘현재’를 살다
  • 오윤미 기자
  • 승인 2009.06.17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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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불붙은 캐릭터 전쟁 ③ 고소설 사례
홍길동 분쟁, 장성웃고 강릉울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끄트머리엔 “너도 커서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당부가 따라온다.

용맹하고 정의로웠던 홍길동이나 아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진 효녀 심청, 바보스러울 만큼 착했던 콩쥐 등은 할머니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다.

설화나 민담, 고소설은 사리사욕에 눈 먼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교훈’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은 이야기 속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삶의 이상향이 내재돼 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같이 올곧게 자란 당대의 ‘엄친아’들이 속속 책 속을 뛰쳐나와 ‘현재’를 살고 있다.

책 속에 묻혀 있던 정의로움과 효 사상 등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이 내재된 고전서사들이 문화산업과 결합하며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는 것. 이는 단순한 현상을 넘어선 시대의 요구로 작용하고 있다.

고전서사가 이처럼 주목받는 이유는 목적이나 규모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원형설화는 몇 세대를 거쳐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다 보니 시공간을 넘나드는 보편성과 익숙함이 전제돼 있다.

생활 속에 선행 학습된 고전서사는 구태여 이야기의 의미를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을뿐더러 대중적 지지 속에 정서적 교감이 가능해 문화콘텐츠 산업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들이 앞 다퉈 고전물 주인공을 지역 얼굴로 내세우다 보니 과도한 유치경쟁으로 지역 간 얼굴을 붉히는 법적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자체와 고전서사를 잇는 매개는 ‘연고’를 바탕으로 한 관계 설정이다.

역사적 고증이 쉽지 않은 허구의 고소설은 자칫 ‘뜬구름 잡기’식의 허황된 사업으로 그칠 우려가 커 캐릭터로서 가치를 점검받기 위해선 다각도의 점검과 노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더욱이 어떤 각도에서 고소설을 조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정경운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는 “문학원형 서사물들이 시놉시스로 가공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원천 소스들이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로 가공된 뒤 필요와 의도에 따라 다른 서사로 재창조되는 것이다”며 “제한된 시놉시스 하나만 개발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개발자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다양하게 확대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즉, 고소설이 지닌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분절돼 있어 부분 연접을 통해 새로운 서사로 재창조가 무한정 가능하다는 것. 이는 고소설이 문화콘텐츠로 각광받는 이유이자 지자체 간 공방의 핵심이기도 하다.

▲ 소설 <홍길동전>에 주목한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를 바탕으로 홍길동 문화콘텐츠 산업에 뛰어든 반면 강릉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강릉 생가를 앞세워 홍길동 사업에 뛰어들었다. 홍길동 상표권 분쟁에서 승소한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 복원 등 홍길동 테마파크 관광지 조성 중에 있다. 사진은 2000년 복원된 장성 홍길동 생가.

▲ 홍길동 분쟁, 장성 웃고 강릉 울었다
치열했던 장성 vs 강릉 홍길동 저작권 논란

 
‘홍길동’을 둘러싼 전라남도 장성군과 강원도 강릉시의 연고권 분쟁은 지자체 간 캐릭터 유치 경쟁의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이 분쟁의 핵심은 ‘사실과 허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전라남도 장성군은 소설 <홍길동전>에 주목한 반면 강릉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 방점을 찍었다. 홍길동이 실존 인물임을 주장한 장성군과 달리 홍길동을 허구인물로 파악, 저자 허균을 앞세운 강릉시는 팽팽한 접전을 이뤘다.

허구와 실존, ‘홍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던 두 지역은 홍길동을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 강릉은 분쟁과 별개로 특허 재등록을 고민했으나 홍길동 캐릭터 대중화에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 홍길동 사업을 포기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강릉은 매년 허균·허난설헌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사진은 2003년 조성한 강릉 홍길동 캐릭터 로드.

논란의 시작은 이렇다. 홍길동 사업의 밝은 전망을 예측한 장성군은 1996년 연세대학교에 연구용역을 의뢰,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며 그의 고향이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90번지임을 밝혀냈다. 홍길동을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낸 장성군은 학계의 고증을 바탕으로 1997년 본격적으로 홍길동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역 간판으로 ‘홍길동’을 내세운 장성군은 문화산업을 선도하며 발 빠르게 성장했다. 홍길동 브랜드화 산업을 장성군의 전략사업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 장성군은 홍길동 기본 캐릭터 25종 등 총 73종의 캐릭터를 개발,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했다.

이듬해 강릉시 역시 홍길동 캐릭터 산업에 뛰어들었다. 강릉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친가와 외가가 모두 강릉에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1999년 홍길동 시비·조각 산책로와 2003년 홍길동 캐릭터 로드를 조성했다.

홍길동 상표 소유권 분쟁은 장성군이 캐릭터 특허 신청을 내기 전 강릉시와 개인이 특허 신청한 상표권이 문제가 됐다. 장성군은 홍길동 캐릭터 독점을 위해 강릉시가 소유한 11개 상표권에 대해 상표등록 취소심판을 걸었다. 승소한 장성군은 홍길동 캐릭터 산업에 탄력을 받으며 ‘홍길동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기몽서 장성군 미래전략사업단 문화콘텐츠 팀장은 “홍길동 캐릭터 소유권은 모두 장성군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장성군 승인 없이는 다른 데서는 쓸 수 없다”며 “현재 45개종 캐릭터를 4차에 걸쳐 개발하고 있고 앞으로도 다양하게 캐릭터를 활용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패소한 강릉은 분쟁과 별개로 다시 특허 재등록을 고민했으나 홍길동 캐릭터 대중화에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 홍길동 사업을 포기했다.

최용규 강릉시청 문화예술과 담당은 “장성과의 상표 소유권 분쟁은 강릉이 가지고 있는 총 300여건 중 11건에 지나지 않는다”며 “90년대 말 홍길동 캐릭터 육성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크게 어필하지 못해 재등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이양섭 (사)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 이사장.
수년간 공들인 사업을 한순간에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터. 강릉의 이같은 판단은 시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반영한 결과였다.

강릉 한 문화해설사는 “강릉에서는 한때 택시에 홍길동 캐릭터를 그리는 등 각종 홍길동 사업을 펼쳤지만 시민들은 뜬금없다는 반응이었다”며 “시민들이 공감하지 못하니 점차 홍길동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었다”고 분위길 전했다.

홍길동 사업에 손을 뗀 강릉은 허균·허난설헌 문화제를 통해 역사적 고리를 이어오고 있다. 이양섭 (사)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 이하 선양사업회) 이사장은 “장성이 소설 <홍길동전> 중심이라면 강릉은 저자 허균의 업적을 기리는 인물 중심이다”며 “홍길동은 가상 인물이지만 <홍길동전>을 한글로 지은 허균을 기리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볼 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11년째 허균과 허난설헌 업적과 사상을 발굴·연구하고 있는 선양사업회는 순수 민간 행사로 허균·허난설현 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 이사장은“허균·허난설현 문화제는 철저히 민간 영역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며 “문화재는 개인의 것도 문중의 것도 아닌 만큼 문화재의 올바른 보존은 주민이 주체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릉은 홍길동보다는 오히려 허균·허난설헌 고향으로 잘 알려진데다 최근엔 ‘솔향 강릉’ 브랜드를 내세워 친환경 도시로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60억원을 들여 솔향수목원과 솔숲 데크로드, 솔숲 체험장 등을 조성하고 있다.

홍길동 분쟁이 일단락되자 장성군은 홍길동을 전면에 내세우며 문화콘텐츠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홍길동 문화콘텐츠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가하면 230,409㎡ 면적에 사업비 514억 6천만 원을 들어 홍길동 테마파크 관광지 조성 중에 있다. 1998년 홍길동 생가 터 발굴을 시작으로 2000년 홍길동 생가를 복원했다. 장성군은 10년 간 홍길동 캐릭터 산업을 평가하는 연구 용역 중에 있다.

▲ 매년 5월 장성에서 개최하는 홍길동 축제는 명실상부 장성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장성은 축제 기간 동안 홍길동 캐릭터 부스를 설치해 외부인들에게 적극 홍보하는 가 하면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홍길동에 대한 군민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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