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울타리숲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울타리숲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5.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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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숲을 복원하자
③전남 무안군 망운면 목동리와 청계면 청천리 마을숲

어쩌면 그들은 울타리부터 만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착지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 그리고 아직은 미완의 마을. 그 땅에 처음으로 들어온 입촌조(入村祖)는 마을의 지형과 주변의 지세를 살펴 울타리부터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온갖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잡귀는 물론 전염병을 퍼트리는 역신(疫神)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끔. 오랜 세대를 이어나갈 풍요로운 터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마을의 개척자들은 울타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울타리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장승을 깎아 세우고, 어떤 경우에는 입석을 세우고, 어떤 경우에는 돌탑을 쌓기도 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나무는 마을을 아늑한 보금자리로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태풍이 불어올 때는 바람막이까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울창한 숲으로 자라난 마을의 울타리숲은 질서와 조화, 안정과 통합, 생식과 풍요를 보장해주는 튼튼한 장벽이 되고 불안과 혼돈의 외계와 구분되는 경계가 되었다.

마을의 울타리숲은 함부로 벨 수 없었다. 그것은 마을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불문율이었고, 마을 자치조직의 엄격한 규약이었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의 수단이었다.

오랜 동안 마을을 지켜온 이런 마을숲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는 고향의 상징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발걸음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반가운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경작지와 마을로 거세게 불어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곡식과 과실과 마을을 풍요롭게 살찌우고 있다.

목동리 울타리숲, 그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

이번에 소개하는 마을숲은 마을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숲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생태적이고 포근한 그런 마을숲을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나가는 마을사람을 붙잡고 마을의 유래와 숲의 유래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누가 숲을 조성했는지, 왜 숲을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물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목동리는 무안군 망운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망운면은 자연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연중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 ‘제발 구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望雲’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마을서쪽 구릉에 조성된 울타리숲. 숲 너머 분지에 주거지가 이어진다.

망운면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하다 퇴직한 채준일(68세) 씨는 “망운은 안개가 없이 늘 맑은 지역이어서 일제시대 때부터 비행장을 만든다고 목포사람들까지 끌려와 노역을 했던 곳”이라고 회고했다. 인근에 무안공항이 들어선 것이 지리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마을 일대는 원래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가 되었다고 한다. 김판곤(65세) 씨는 “청계 도대에서부터 톳머리 앞바다가 간척지로 매립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망운은 울창한 마을숲과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을 가진 천혜의 고장이었다”면서 “목동리 마을숲은 주민들의 삶과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위대한 자연유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망운목장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목동’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구술과 사료를 종합하면 목동리는 조선시대에 말을 사육한 전국 21개 목장 중 한 곳이었다. 목동·목남·주교·앞창·해동 등 5개 마을에 걸쳐 목장이 있었으며, 총면적은 21.3㎢에 달했다고 한다. 제주에서 말을 들여와 이곳에서 사육하여 한양으로 보냈는데, 감목관이 파견되어 목장을 관리했다.

그렇다면 누가, 왜 마을숲을 조성했을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을 피해 전주최씨, 강릉유씨, 진주강씨가 들어왔고, 마을숲도 그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어느 날 지관이 찾아와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숲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야 마을이 번창한다고 하여 구릉을 따라 빙 둘러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밭과 밭, 주택가와 밭 사이의 구릉을 따라 조성된 마을숲. 현재는 망운면사무소 주변을 포함한 동쪽 구릉과 서쪽 구릉에만 숲이 남아 있어 원형을 짐작할 뿐이지만, 원래는 목동, 목서, 목남, 목북 마을을 완전히 에둘러 숲이 있었을 것이다. 서쪽 구릉에 있는 숲의 길이는 약 500m, 동쪽 구릉에 있는 숲의 길이는 약 300m에 이른다.

수령이 50~400년 된 팽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느티나무, 엄나무까지 포함하여 노거수는 모두 179본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참느릅나무, 쉬나무, 때죽나무, 닥나무, 물푸레나무, 아카시나무, 예덕나무, 소태나무, 벚나무, 소나무, 보리수나무, 붉나무, 대나무 등이 군데군데 숲을 이루고 있다.

▲ 마을 동쪽 구릉에 조성된 목동숲. 숲 너머로 경작지가 이어진다.

마을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풍경화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이 흘러나올 것 같은 목가적 풍경이다. 목동리 마을숲은 이렇게 마을 울타리와 경계 역할을 하면서 서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또한 농사철에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농부들의 구슬땀을 식혀주는 휴식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서쪽 구릉에 남아 있는 마을숲은 농로로 이용되는 마을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황토밭과 어우러진 마을숲 걷기 체험장으로 활용하면 좋을 듯하다. 동쪽 구릉으로는 마을에서 밭을 지나 마을숲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손색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에 서운한 청천리 줄나무숲

마을숲을 찾아다닌다는 우리의 말을 듣고 목동리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가보라고 권했던 숲이 바로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마을숲이다. 이 숲은 마을 앞 서쪽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해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마을 앞이 트인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된 울타리숲이다. 이 숲을 통과하면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 마을숲 북쪽 끝에서 바라본 청천리 숲. 밖에서 보면 마을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마을 입구의 ‘청천마을 유래비’에 의하면, 1456년(세조 2년) 단종복위가 되지 않자 벼슬을 버린 달성배씨 증암(甑巖) 배회(裵繪)가 경상도 칠곡에서 살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현재 40대까지 이어져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숲의 유래에 의하면, 처음에 증암이 입촌하였을 때는 마을 앞이 트여 있어 서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도사가 마을 앞에 나무를 심으면 피해를 입지 않을 거라 하여 100여 그루의 나무를 구해와 심은 후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해풍을 막아주고 자손도 크게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이 숲에는 수령 500년가량 된 팽나무 54그루와 느티나무 60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으며, 나무의 흉고둘레는 평균 3m이고 수고는 30m에 이른다. 그 아래로 호랑가시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노린재나무, 계요등, 인동, 찔레나무, 사위질빵, 댕댕이덩굴, 담쟁이, 노박덩굴, 마삭줄, 송악, 청가시덩굴 등이 함께 자라고 있다.

이 숲은 방풍과 비보를 목적으로 조성되어 마을주민들의 각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리고 1962년부터는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까지 받고 있다. 청천리에는 나무의 가지를 꺾거나 열매를 따먹으면 큰 병에 걸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때문에 지금까지 숲이 잘 보존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가로수로서의 기능을 크게 발휘하고 있으며, 중간에 정자를 설치하여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도로와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자동차 소음을 막아주는 방음림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마을숲, 그리고 ‘울’과 ‘우리’

목동리와 청천리, 무안군에 있는 두 마을의 울타리숲을 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우리’라는 말을 곱씹었다. ‘우리’의 범주와 그 경계가 갑자기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와 ‘울타리’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나경수 교수의 견해를 빌리면, ‘우리’와 ‘울’은 어원이 같고, 우리라는 말이 미치는 범위와 울타리가 둘러쳐지는 범위도 비슷하다고 한다.

▲ 마을숲을 따라 길게 이어진 오솔길(청천리).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마을, 우리 학교, 우리나라, 우리 민족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 세계, 우리 인간, 우리 지구 등의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울이나 울타리 역시 가옥에서 시작하여 마을, 학교 그리고 가장 크게 국경으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옥구조에서 울타리가 없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킬 것이 많은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우등 같은 초가삼간조차 울타리가 없는 집이 없었다.

싸리나 나뭇가지로 둘러친 바자울이든, 탱자나무나 쥐똥나무를 빙 둘러 심은 생울타리든, 돌담이든, 토석담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고 나면 반드시 울타리나 담장을 둘렀다. 가옥구조가 서구화된 요즘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집, 아니 마을에까지 울타리를 만들어온 오래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만큼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를 가리켜 ‘우리 집사람’이라고 말할 정도 아닌가. /김경대 기자·정명철 전남대 문화재학 박사과정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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