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연대 없으면 노동운동 미래 없다”
“나눔과 연대 없으면 노동운동 미래 없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04.28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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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종현 전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장
“대공장-정규직 중심노조 비정규직 내 문제로 인식 안 해”
“민주노총 투쟁일변도 타성 젖어…합리적 해결책 모색 필요”

119번째 노동절을 맞는 노동계의 표정이 우울하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자본이 해고와 임금삭감, 비정규직 양산을 남발해도 속수무책이다. 노동운동의 위기가 짙어지고 있지만 좀처럼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위기를 돌파할 해법은 없을까. 묘수 따위를 기대했다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어려울수록 철저하게 기본으로 돌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1987년 대우캐리어에 입사한 뒤 20년 이상 노동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박종현 전 민주노총 지역 본부장을 만났다. 묘수가 아닌 쓴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때론 쓴 소리가 보약이 되는 법이다. 인터뷰는 23일 캐리어 에어컨 광주공장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박종현(51) 전 민주노총지역본부장은1987년 대우캐리어에 입사해 이듬해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89년에는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97년에는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장을 역임했다.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와 권영길 선거운동본부, 국민승리 21 등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활동했다.

-. 노동운동의 위기가 광범하게 회자되고 있다. 원인을 진단한다면.

과거 민주노조운동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투쟁의 명분도 있었다.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였다.
  
하지만 IMF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대공장중심으로 바뀌고 비정규직이 확산되면서 노동계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만큼 공감대 형성도 어려워졌다. 

대기업 노조가 명분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연대보다 갈등을 겪는 사례가 더 많다.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이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해 비정규직에게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노동운동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로 가고 있다.
  
민주노총도 이를 잘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규직과 대공장 중심의 노조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투쟁이 구호에만 그치고 생색내기 사업으로 전락하면서 그 진정성도 흔들리고 있다. 스스로 내부혁신을 이야기 하지만 실천과 사업측면에서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연대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 자본과 권력의 노동운동 통제방식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나. 

물론 자본과 권력이 노동운동을 분리통치 하려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문제는 민주노총이 큰 틀에서 전략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략이 부재하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사안만으로 투쟁하다 경제조합주의에 매몰됐다.
  
매시기 큰 그림을 그리고 운동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한다. 사회적 의제 설정을 위해서도 나름 노력했지만 미흡했다. 내부역량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사회적 의제를 남의 문제로만 치부했던 것이 근본원인이다. 
  
-.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이뤄졌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민주노총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많은 실험을 했고 민주노동당을 원내에 진입시키는 성과도 이뤄냈다. 하지만 노동자 정치의 지역의제를 제대로 발굴하지 못했다. 당에서 주문한 내용만 따르다보니 노동자와 현장중심의 활동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
  
현장정치라고 해봐야 당의 결정을 따르고 투표하고 당비를 납부하는 수준이 거의 전부였다. 현장에서 활발한 토론과 고민이 절대 부족했다. 그 때문에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선언했어도 조합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노동자 전체와 함께하는 정치세력화가 아닌 몇몇 사람의 정치세력화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현장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돼야 한다. 그런데 중앙의 지침과 방침만 있었을 뿐이다. 지도부와 현장조합원이 유리된 채 서로 겉돌다가 결국 활동가들만의 개별적 정치행위로 잦아들고 말았다.
  
현장조합원들이 정치세력화에 대해 아직까지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직장생활만 열심히 하면 됐지 노동자가 굳이 정치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현장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현장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 최근 몇몇 사업장의 민주노총 탈퇴로 제3노총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또 하나의 이익집단이 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경제위기를 말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운동을 펼치자는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의 영향력이 떨어지자 자기만의 이익집단을 만든 것이다. 얼마가지 못하고 일시적인 바람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당장은 현재 집행부의 성향대로 가겠지만 현장은 변화무쌍하다. 내부모순이 드러나는 순간 현장이 이를 바로잡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혁신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 민주노총이 투쟁일변도의 전략과 전술을 운용하는 것에 문제는 없나.
  
민주노총지역본부와 노동단체들이 타성에 젖어 있다.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일단 투쟁부터 하고 본다. 대화와 타협보다 투쟁을 하는 방식이 정통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제3의 목소리가 나올 수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다. 당장 하루하루가 목이 마른데 완벽한 샘을 만들자고 싸움만 한다면 되겠는가. 노동조건이 단박에 바뀌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하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 현장에 무조건 지도노선만 따르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다.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조합원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합리적인 대안을 내와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 전망을 세울 수 있다.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역작용을 부른다.
  
현장의 처지를 말하면 타협으로 비춰지고 투쟁대오를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지도부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것보다 현장 조합원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현장의 고통이 운동가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 민주노총이 개입하면 사주들이 협상을 기피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 노동운동의 정파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많다.

현장 지도부가 정파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나가는 경향이 있다. 정파적 입장에 서게 되면 서로 협상하고 조율하는 자세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주도권을 쥔 집행단위 이외의 자문과 조언이 먹혀들 수 없는 구조다. 각 정파들이 지역운동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보이지 않은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파들이 과시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한건 터뜨리기식 사업이나 한탕주의식 사업을 하는 것은 시급하게 지양돼야 한다. 

-. 위기를 돌파할 해법은 없나.

실제로 위기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민주노총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민주노총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를 보는 시야도 전반적으로 넓혀야 한다. 자신만의 관점만 강조하다보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이 시민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다. 현장 밖으로 나와 지역사업장과 비정규직, 주민들과 함께 하는 교류의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힘과 역량을 오로지 자기문제에만 집중하는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로는 안 된다.
  
위기돌파를 위해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통한 진보정당운동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을 두 축으로 병행해야 한다. 현장에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매개 고리가 빈약한 실정이다. 민주노총이 지금처럼 좌판깔기식 운동을 고수한다면 위기돌파는 요원하다. 

-. 민주노총이 일자리 나누기 운동을 제안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자리 나누기가 내부 조합원간 밥그릇 싸움으로 비화돼 갈등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잔업과 특근, 철야 등이 없어지면서 소득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동료마저 경쟁관계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용을 보장받는 것이 더 시급한 현안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을 당하면 주변의 시각 때문에 엄청난 심리적 좌절을 경험한다고 한다. 공장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구동성으로 오래 살아남으라고 한다. 나와서 살아보니 현장이 그렇게 따뜻하고 편한지 몰랐다는 것이다. 
  
-. 자본과 권력의 신종 노동탄압에 노동운동이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고소고발과 손배가압류의 위력이 대단하다. 특히 손배가압류가 들어오면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싸울 의지도 사라지고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 되다시피 한다. 돈 문제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나기 때문이다. 50만원에서 200만원에 이르는 벌금도 큰 부담이다. 노조가 여기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 민주노총도 양보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기득권을 사수하면서 변혁을 이야기한다면 누가 신뢰하겠는가. 현장의 쓴 소리가 보약이다.
  
지난 22일부터 지역본부가 해고·실업·빈곤 없는 광주 만들기 대행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진정성 있게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정치적 효과만 노린다간 금방 들통이 나게 된다. 지역본부가 환골탈태하기 위해서는 현장조합원을 감동시켜야 한다. 현장조합원과 적극 결합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현장 따로, 지역본부 따로 가면 안 된다. 조합원들의 일상 속에서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십년동안 반복해온 사업방식이나 집회형식에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일단 투쟁도 재미와 흥이 있어야 한다. 

-. 마지막으로 지역노동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소통하는 문화가 없다. 나눔과 연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동운동의 미래도 없다. 민주노총이 아래로 내려가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공감도 지지도 받을 수 없다.
  
고립은 곧 실패로 가는 길이다. 노동운동이 베풀 건 베풀고 나눌 건 나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사회로부터 동의를 얻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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