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되는 사람들, 포기되는 인권
추방되는 사람들, 포기되는 인권
  • 최완욱
  • 승인 2009.03.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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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욱(광주인권운동센터 사무국장)

정치가 무엇이냐고 제자가 물었더니 공자가 ‘이름을 올바르게 짓는 것’이라고 했다는데,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짓는 것이 권력의 핵심 중 하나라는 걸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양극화’가 문제라고 하지만 적절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양극화’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화’가 타당한 이름 짓기라고 여겨집니다. 이 시대는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소수의 중심과 권력과 자본에 추방된 다양한 집단으로의 주변화 되는 시대입니다. 추방의 시대입니다.
  
인권의 추방, 위기의 일상화
  
오늘날 국가권력의 폭력에 의해 시민들이 정치에서 추방되고, 광장과 거리에서 추방되고, 권리에서 추방되는 상황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어느덧 10년,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구조조정은 경제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한 번’ 필요한 것이 아닌 매번의 구조조정으로 이제 하나의 사회구조가 되었습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어민들이 추방되고,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평택 대추리 주민들이 폭력적으로 추방되고, 이주노동자는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죽어가고, 아무런 사전 동의 없이 한미FTA가 급작스럽게 체결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권력과 자본에 의해 추방당한 사람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고, 곳곳에서 시시각각 출몰하고 있습니다.    

불안정과 위기가 사람들의 삶의 기본조건이 되었습니다. 삶터에서 추방당한 이들은 위기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3권 등 헌법에 명시된 최소한의 기본권을 생존을 위해, 국민으로 남기위해 포기하는 방법 말입니다. 살기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주변으로 추방의 10년을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미완의 민주주의? 미흡한 발전과 근대화?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근대적 발전을 이룩하면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추방은 완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겠습니다. 이 불가피함이 사람 많이 죽였습니다. 사람부터 살고 봐야한다는 미명아래 새만금의 무수한 생명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농민들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위해 비정규직들이 희생이 불가피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장애인들의 분배의 요구는 정당성과 상관없이 경제성장을 위해 배제되는 일부가 되었습니다. 추방의 정당성은 언제나 ‘다수성’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인권의 눈으로 다시 이름 지어야
  
민주주의도 다수결입니다. 물질적, 양적 발전인 근대적 발전 역시 ‘다수성’입니다. ‘다수’가 ‘다수’를 추방하고 있는 뒤집어진 세상입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사실상 ‘전체’이고, ‘정상’에서 벗어난 ‘예외’가 정상을 이루고 있는 게 오늘의 한국 사회입니다. 이러한 추방의 사회, 주변화 되는 사람들에게 인권은 가치에 있어 소수자, 약자입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말하기 전에, 민주주의를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선진화’, ‘발전’을 말하기 전에 ‘발전’을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인지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말입니다.

사라져버린 새만금의 수많은 생명의 눈으로, 이주노동자 눈으로, 장애인 눈으로, 새로운 이름짓기를 해야 합니다. ‘권리’를 말하기 전에 권리 자체가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인권의 눈으로 인권을 말하는 것이 새로운 이름짓기의 첫 걸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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