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개
촛불과 개
  • 전청배
  • 승인 2009.03.2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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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청배(자유기고가)

개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잘 길들여진 개는 주인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인의 심리상태를 예리한 시각이나 후각으로 인지해내는 특별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는 분이 기르는 개는 고향이 진도랍니다. 이름이 ‘진돌이’인 이 녀석이 얼마나 영리한지 보는 사람마다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속된 표현으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모습이 때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든 마구되어 변변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개’라는 접두사를 씁니다. 개죽음, 개꿈, 개수작, 개나발, 개망신 등의 단어가 있습니다. 자유와 정의가 짓밟혔던 지난 시대를 ‘개 같은 시절’이었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습니다. 그 시절, 군홧발에 무너진 사법권을 향해 ‘개 같은 판결’이라며 ‘사법부가 독재자의 주구(走狗)가 되었다’고 비웃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촛불 진화나선 사법부 속내 궁금
  
촛불은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힙니다. 촛불은 횃불처럼 무엇인가를 뒤집기 위해 치켜들지 않습니다. 촛불은 들불처럼 무엇인가를 태워버리려고 밝혀 드는 것이 아닙니다. 촛불은 하염없이 내리는 어둠을 길손처럼 소리 없이 밝히는 것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저항 중에서도 가장 소극적이고 평화적이며 성스럽기까지 한 저항입니다.
  
부모와 함께 광장에 나온 어린 아이들, 단발머리 중학생들까지도 함께 했던 촛불의 축제가 무엇이 두려워서 사법부의 대표 격인 대법관까지 좌충우돌하며 진화에 나선 걸까요. 촛불집회는 체제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정권퇴진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비폭력 평화적인 순수한 주장이었기에 대선과 총선에서 현 정권을 지지했던 국민들까지 함께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2월인가 대통령이 새로 임명한 대법관의 행적이 구설수에 오르더니 급기야 대법원장까지 그의 그릇된 사법 간섭이 부당한 처사라고 윤리위에 회부한다고 난리입니다.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일이라고 하지만 대법관의 직무를 수행할 분을 임명해야지 ‘알아서 기는 기술’이 뛰어난 분을 임명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신시절, 사법적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법조계의 자성이 있었던 까닭에 ‘이제 우리나라 사법부도 달라지겠구나’ 하고 약간의 안도를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대착오적인 한 분의 충정인지, 소신인지 덕분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얼마나 잘 기었으면 그 높은 곳까지 오르셨을까요.
  
역사의 수레바퀴 거꾸로 돌리나
  
‘승냥이와 이리’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승냥이와 이리여! / 송아지 이미 채 갔으니 / 양일랑 물지 마라 /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아라 / 얼마나 크나큰 슬픔이더냐 / 이미 모든 것 빼앗아 갔으니 / 또 누구를 헤치려하느냐?’ 형사사건을 담당한 관리들의 횡포를 그린 다산선생의 시입니다.
  
그 분은 아마도 유신시절이나 5공화국시절에도 법복을 입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짖으라면 짖고 물어뜯으라면 뜯는 ‘충견 득세의 시절’에도 엄정한 법 집행(?)을 잘 하셔서 승승의 영전을 거듭하셨겠지요. 촛불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광화문통에 산성을 쌓았을까요. 물대포를 쏘아대고 여대생을 짓밟았을까요. 줄줄이 연행하여 구속시켜 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충성스러운 대법관을 임명하여 사법부의 질서까지 흔드셔야 했을까요.
  
승냥이나 이리도 개과의 동물입니다. 그 시절 그 추억의 습성을 잊지 못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승냥이와 이리의 개수작에 개들이 웃습니다. 개망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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