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말고 ‘거인왕’을 달라고
붕어빵 말고 ‘거인왕’을 달라고
  • 최권행
  • 승인 2009.03.1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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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권행 (서울대교수, 불문학)

16세기의 프랑스 작가 라블레는 거인 왕을 내세운 연작 소설로 유럽 문학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구전 민중문화를 한 축으로 삼은 입심 좋은 그의 소설에는 가르강튀아라는 주인공의 탄생을 놓고 거인 왕 아버지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는 장면이 나온다. 
  
산고로 인해 아내가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 속에서, 죽음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활기가 넘치게 된다. 새 생명인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기 위해 온 궁정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다.
  
붕어빵 찍어내는 교육현실 아쉬워
  
길거리에서 만나는 햇병아리들의 재잘거림은 그냥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하고 볼이라도 쓰다듬고 싶어진다.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저 생명력이 필경 세상을 싱싱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 버스 간에서 만나게 되는 중고생들이 흐릿한 조명 아래 참고서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애처롭다.
  
무엇을 배우고 자라간다는 것이 결코 마냥 놀며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심지어는 유치원 시절부터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며, 주로 문제집 푸는데 10년, 15년을 바치는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봄날 따뜻한 햇살 속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보더라도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지기도 한다. 그들이 통과해야할 관문들이 마치 깊은 터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로 암기와 사지선다, 오지선다 시험의 반복 훈련을 통해 정답을 찍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한 아이의 지적 능력을 키우는데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그보다는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생각하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발 아이들이 갖는 자기 시간이 넉넉해야 하지 않을까?
  
왜 이 나라는 저 팔딱거리는 생명력이 지쳐가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들이 고갈되어 가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기성세대는 혹시, 붕어빵이 되어가는 아이들이 자기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존엄한 거인왕으로 아이들 키우자 
   
더군다나 개천에서 붕어빵은 나와도 용은 나올 수 없게 된 오늘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청소년과 그 가족들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자기 삶의 존엄함을 간직하려 하겠는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할 아이들이, 누군가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누리고, 또 누군가는 자칫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으로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면, 정직하게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그런 사회가 어떻게 ‘우리나라’가 되겠는가?
   
오랜 지기인 독일교민의 가정에서 보니, 아이가 한 반 독일 친구와 ‘매’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러 날 ‘함께’ 지내며 밤늦도록 백과사전과 인터넷을 뒤지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는 능히 자신과 벗을 아끼며 삶을 사랑하는 인재로 자라지 않을까?

장차 왕이 될 가르강튀아의 교육은 암기를 통한 ‘꽉 찬’ 머리가 아니라 건강한 판단력 형성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왕국은 ‘만인이 일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을 저마다 존엄한 ‘왕’이자 ‘거인’으로 키우는 비결이 5백 년 전에 이미 그려져 있다는 생각이 드니 사교육을 통한 붕어빵은 그만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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