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GRAY CITY)를 가르다
회색도시(GRAY CITY)를 가르다
  • 범현이
  • 승인 2009.03.13 2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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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으로 세상을 여는 조각가 위재환(38)

자주 가는 시내의 한 카페에서 작가의 도록(圖錄)과 작품을 함께 만났었다. 지금껏 보아 온 도록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체성이 분명히 있었다. 신선했다. 모든 작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작품과 도록은 작가의 얼굴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최선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 위재환 조각가.
길고 가느다란, 약간의 청회색 빛을 띠는 도록이다. 하얀 순백의 몇 장은 둥글납작하고 귀여운 표정의 조각들이 배열되어 있고 공간을 널찍이 비워 둔 곳곳에는 무심한 표정의 드로잉이 조각들과 어울리며 낙서처럼 자리한다. 말풍선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조각이 어울리며 서 있고, 길게 뻗어있는 선들을 이어가다보면 거기서 또, 작가의 작품을 웃음으로 만난다. 귀엽고 넉넉한 무엇인가에 와 닿는다.

작가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상쾌하다. 평소의 우울을 확 깨게 해줄 정도로 넉넉한 가슴도 지녔다. 작업실 문을 열면 좁은 공간 안 웃음이 화사하다. 순간 향기롭다.

멀리보고 천천히 가는 길

평안하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또 맞았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그에게 드러나 있는 길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 몸이 힘들다는 것은 오히려 그가 누리는 행복이고 안락함이다.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고 지금까지 줄 곳 한 길이다. “세상은 나에게 조각으로 열려있다. 재료를 선별하고 흙을 뭉개고 다시 틀에 찍어내는 작업을 하는 시간은 즐거움, 그 자체다”고 고백한다.

열악한 환경으로 작업을 포기하며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생활을 찾아 떠나도 작가는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앉아 여전히 작업의 손을 놓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각 작업은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자 생활이다”

조각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드로잉을 하는 이유다. 작업실 이곳저곳에 걸린 드로잉 작품들은 작가의 덩치에 맞지 않게 세밀한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잘 그려진 짜임새 있는 작품보다는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나머지 분량의 구성과 덧칠은 보는 관람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성(城)들, 길을 이어가는 꽃과 나비, 조그만 메시지들……. 그는 화면 안을 처음부터 온전히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넓은 여백을 두고 그 사이 누군가를 먼저 배려한 채 보이지 않은 한 쪽에 자신을 약간 표현했을 뿐이다. 작가만의 독특한 드로잉의 맛과 멋이다.


회색의 도시에 희망 나무를 심다

통통한 어린아이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당긴다. 내 통통한 볼을 한 번 만져주라고, 혹은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내 손을 둥실둥실 만져 달라고 암호를 보낸다.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갈색 옷을 걸친 아이들의 이야기다.

그의 작품 안에는 보면 웃음이 픽! 나올 것같이 귀여운 아이들의 표정을 한 조각들이 등장한다. 조각들이 작가를 넉넉히 닮았다. 적당히 갈색으로 감추어지고 내재되어있는 슬픔도, 작가의 호탕한 웃음 뒤에 가려진 슬픔과 고통까지 쌍둥이처럼 닮았다.

멀리서 보면 귀여운 동그란 선들이 가까이서 보면 둥글지만은 않다. 둥그런 선을 만들기 위해 각(角)지고 모났던 시간들을 있는 힘을 다해 사포로 밀었고 그것 역시 작가의 삶의 표현방식이다. 비로소 둥글어진 선이 탄생한 이유다.

작가는 회색의 도시에 작품으로 희망의 나무를 심는다. 각지고 설움 많던 세월들을 둥그런 선이 되도록 정을 쳐 다듬고 마음의 대패를 이용해 깎아 내 튼실한 가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무를 심는다.

익명의 도시 안, 불특정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혹은 투명 인간처럼 왔다가 사라져도 끝내 뿌리를 굳건히 하고 서 있을 나무를 심는다. 회색의 도시가 살아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생명을 누리는 도시의 나무는 더 융성해져 회색을 넘어 푸른빛으로 진화한다.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놓아버리니 세상은 내게 더 다가와

시간의 공간 사이에서 전혀 알 수 없는 ‘해프닝’을 꿈꾸기도 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세상이다.
돌을 깎고 합성수지로 모형을 만들고, 다시 다듬으며 그는 다시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작품으로 말하고 다가선다. 행복을 말하기도 하고, 삶이란 바로 생활이라고 시간의 공간성을 말하기도 한다. 이 모든 해프닝이 그의 작품 안에 담겨있고 작가가 온전히 말하고 싶은 전부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에게 합성수지의 냄새는 고향의 냄새이며 바로 살아가는 향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열심히 작업한 성과는 주변에서도 알아준다. 도움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는 이유다. 작가는 멀리 한꺼번에 뛰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 발 한 발 조금씩 다가가다 보면 세상은 점점 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 서울 전시회에서도 작가는 조급해하지 않고 갤러리 안에서 차분히 앉아 드로잉을 즐겼다. 이번 광주 전시에서도 그럴 것이다. 빛도 모셔왔다. 지인의 도움으로 LED가 전시장 안으로 들어와 그의 작품을 더 빛나게 한다.

“내 작품이 어두운 곳에서 빛을 끌어들여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예측할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나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관람객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안고 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일시 : 3월18일(수)까지. 장소 : 광주롯데화랑. 문의 : 010-5609-4006.

프롤로그

▲ 위재환 作「집으로 가는 입구」


「겨울들판」    - 문정영 작(作 )

세상에 빚지고 있는 마음 / 물줄기 따라 여기까지 왔는가 / 돌멩이들 하얗게 마르고 뼈 드러난 / 가을 풀에 덮여 얼굴 수척 / 한 강물이 찬바람에 살려간다 // 닫아도 다시 열리는 삶의 좁은 틈 / 시련은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 얕게 흐르는 마음 얼게 한다 / 들녘의 젖은 짚단들 또한 가슴 속에 가을빛을 품고 살지만 /빌려 온 옷을 벗어버린 산기슭의 나무들이 / 다시 시커먼 군상이 될 때 / 사라져버린 발 뿌리로 허전하다 // 불혹의 나이만큼 / 들판에서 곡식으로 거두어지고 / 이제는 불 지르면 쉽게 타버릴 가벼운 몸뚱아리 / 지상에 남길 자국은 없다 // 언 무릎으로 서 있는 짚단들 / 비틀거리며 황량한 들을 지키는 것은 / 겨울 지나면 / 가슴 위에서 자라날 푸른 등성이 때문이다.  

                                                   

창 밖,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황망하게 바라본다. 뿌리에서 땅살로 흩어지는 고요한 숨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충분히 멈추었다가 천천히 자신의 살밑으로 떨어지는 것. 팽이발로 돌다 쓰러질 수는 없다. 달팽이처럼 단단하게 오그린 강둑을 지나 산으로 걸어가는 길들. 어제 내가 버린 비뚤어진 생각들이 떡갈나무 잎사귀로 흔들린다. 떨어질 듯 마른나무의 손을 붙잡고 있다.

마음 속 벽에 문 하나를 걸어 놓았다. 빗장이 잠겨서 잠든 사이, 늦은 밤까지 문고리를 두드리던 바람이 기어이 잎사귀를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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