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으로 장성 누천년 역사 돌아본다”
“비석으로 장성 누천년 역사 돌아본다”
  • 오유미 장성군민신문 기자
  • 승인 2009.03.0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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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갑 장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장성 금석문’ 조사
 

   
장성문화원 향토연구소 공영갑 소장
장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공영갑 소장이 ‘장성의 금석문’을 분석 정리해 1000여 페이지 분량의 단행본으로 펴냈다.

이번 장성의 금석문 조사는 지난해 4월 향토사연구소가 장성문화원 부설 연구소로 개소한 후 처음 시작한 사업으로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금석문 중 묘비, 세장비, 표식판 등을 제외한 각 마을 단위별로 산재한 모든 금석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장성의 금석문은 금문(쇠에 새긴 글씨) 7기, 석문(돌에 새긴 글씨) 552기로 총 559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석문은 공적·기념비가 125기로 가장 많았으며, 선정·청렴비와 불교관계비가 55기, 암석문 50기, 정려비 20기, 열녀·열부비가 30기, 효자·효녀비가 28기 등이었으며, 충신·열사비는 3기로 나타났다. 또한 이 책은 읍면별 비석의 숫자와 위치, 좌대의 형태와 크기, 비석의 머리 형태와 크기, 비석의 재질 등을 구분해 싣고 있다.

공 소장은 “비문 서체는 해서체가 대부분이었으며 행서와 예서체는 극소수였다”고 말하며 “비석의 재료 중에서 1900년 이전에 설치된 화강 재료는 자연적으로 마멸되고 부식의 진행과정이 빨라 보존의 어려움과 경제적, 채석 기술 부족 등으로 글자 판독이 불가능 했다”고 말했다.

또한 “금석문은 다른 형태의 문자 기록과는 달리 영구적인 성격을 지녀 역사를 재조명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며 “충신·효자·열녀 등의 자료는 후손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단행본으로 펴낸 1000페이지 분량의 '장성의 금석문'
공 소장은 지난 4월부터 해 뜨기 전 집을 나와 해 진 후 집에 들어가 새벽 2~3시까지 그날 조사했던 것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힘든 작업을 8개월 동안 해냈다. 길가에 돌 하나만 서 있어도 무조건 차부터 세우고 본다는 공 소장은 “비석 하나로 몇 천년 역사가 새로 쓰이기도 하는데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하고 정리하는 작업보다 정작 더 힘들었던 것은 “오래전 새겨진 문자들이 비바람에 깎여 판독 불가능한 것만으로 마음이 급한데 장성호의 수몰, 상무대 편입, 철도, 고속도로 부지 편입 등 각종 개발로 사라져간 유산과 정각 출입이 어려워 조사되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공 소장은 “금석문은 문헌사료가 부족한 시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오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유용한 자료이다”며 “장성의 금석문을 조사 정리한 것처럼 향토연구소에서는 사라져 가는 조상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첫 번째 사업은 장성의 향교·서원·사우 35개소의 실측, 연혁, 배향인물의 행적, 건축물 구조형태, 제사를 지내는 절차, 축문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또한 가사문학과 조선중기의  사상, 예술, 풍류가 살아 쉼 쉬고 있는 누정문화를 책으로 펴내는 작업이다. 더불어 누각이나 정자에 있는 명시나 현판도 수록할 계획이다.

또한 틈틈이 1910∼1937년까지의 인문지리 현황을 담은 국내 최대의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 장성편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과 장성의 지명 유래도 자료로 남겨두는 등 장성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해 둘 계획이다. /오유미 장성군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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