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상에서의 하루
어느 지상에서의 하루
  • 범현이
  • 승인 2009.03.06 20:3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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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테미즘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작가 이석원(56)

▲ 이석원 작가.
작업실을 향해 가는 길 내내 행복했다. 너릿재를 넘어가는 동안, 눈(目)에 보이는 산들은 온통 흰색으로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겨울, 몇 번의 눈이 내렸지만 눈(雪)에 감격한 적은 없었다.

온통 산 정상에부터 눈(目)에 보이는 들길까지 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다. 듬성듬성 보이는 거뭇한 밭길 등은 살짝 찌다 만 쑥버무리이다. 보던 길 다시 보고, 느릿하게 가는 동안 익숙한 길들이 낯설어 지며 초행길보다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

폐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진눈깨비로 내리는 눈들은 여전히 차창 안을 습기 차게 만든다.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은 차 앞 유리의 습기는 눈 쌓인 산들과, 그 산 위를 휘몰아치고 있는 비구름과 바람,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공기의 빛깔들이 경계가 없는 다른 세상을 보게 한다. 유리창 밖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다.

넓은 공간, 탁 트인 시야 그리고 오방색(五方色)

폐교에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보아 온 불화나 탱화가 아닌 작가만의 세상이 거기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만의 고유한 민속신앙과 토테미즘이 거기 그대로 온전하게 자리한다. 시간을 한없이 거슬러 오른다. 일단 마음이 편안해지며 그림 안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무언가를 기복하게 되고 소망하게 하는 마력도 지녔다.

“초기에는 민속신앙에 기초한 것을 그리면서 많이 거칠다는 말을 주변에서 듣곤 했다”고 작가는 웃으며 말한다. 보여주는 그림을 따라 읽어가다 보니 최근의 그림들은 마음을 다한 듯 보인다.


100호정도의 화폭 안, 흐드러지는 벚꽃이 만개하고 있다. 몽롱한 보라색을 바탕으로 결코 밝은 봄날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봄날이 거기 있다.

강렬한 빛을 발한다. 교실 이곳저곳에 걸려있거나 벽에 기대어 있는 크고 작은 그림들을 본다. 자석처럼 흡착되어 그림 안으로 빨려 들여간다. 오방색을 주조로 붉은 바탕에 하늘의 신(神)과 지상의 인간들을 이어주는 매개인 무당들의 지난한 표정이 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지상의 모든 짐들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감히 뿌리칠 수 없는 무언가의 기운이 느껴진다.

강렬한 선, 색깔, 둔탁한 음영을 넘어

늦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의 그림을 본 많은 이들이 혹, 동양화 전공이며 불화나 탱화가 아니냐는 말을 하곤 하지만 엄밀히 따지지 않아도 그의 그림은 자신을 그릴 뿐, 탱화도 불화도 아니다.

1984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만난 ‘박생광 전'은 충격이었다. 그림이 단지 아름답거나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이 지금의 표현 방법이다.

자신의 방법을 찾아 자신만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 탱화나 불화의 형식을 빌렸을 뿐이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 역시 삼베, 종이 컵, 돌가루 유화, 아크릴, 장지(壯紙)까지 경계가 없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만 익숙할 뿐, 재료나 표현의 방법, 형식은 문제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캔버스에 유화로 작업했다. 내가 원하고 살아가고 싶은 삶의 느낌,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민속신앙의 느낌이 나지 않아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결국은 가장 최상의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은 삼베를 사용해 아크릴 물감을 덧칠하듯 사용한다”

그림에서 보이는 민속적인 토테미즘이 강렬한 원색으로 다가 온다. 우리 어머니들의 소망도 보인다. 자식을 위해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주는 어머니,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온전하게 버리는 소망이고 바람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들을 토속신앙과 결부시켜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림 안에는 삶의 생로병사가 담겨있어

하얗고 차가운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말을 건다. 나 여기 있어. 아직은 살아있어. 보기에도 처연한 모습으로 애써 말을 건다.

<탄생> 시리즈에는 사람을 중심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온갖 표정들이 묻혀 진 듯 담겨있다. 울고, 웃으며,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이 무표정하다. 어떤 경지에 이른 듯한 작가의 표현 방식에 두드러져 보인다. 어떤 색깔과 깊이였든 고통을 느끼지 않고 거치지 않았다면 표현할 수 없는 깊이다. 너무나 담대한 표정의 그림이어서 오히려 당혹스럽다.

작가는 그림으로 자신을 말한다. 그림으로 시대와 소통하고 자신의 주변까지도 아우른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바라보는 삶이다. TV화면 안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드라마를 상영한다. 의자에 앉아 보는 나는 드라마의 전개를 너무도 잘 예견하며 때로는 흥분하고 때로는 울고 웃으며 감동하고 애증을 갖는다.

다시 나는 드라마 밖 현실에서의 나를 본다. 어찌된 일인지 방금 드라마로 예견되던 시간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혼자다. 절망의 깊이다. 아득한 깊이가 피부에 와 닿는다.

<환생>은 또 어떤가. 심청이가 연꽃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영혼으로 살아나 울림을 갖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 여긴 곳, 한 번 사라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인 줄 알았던 것에서 그림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꽃을 피운다. 연꽃으로 다시 환생해 이 세상을 향해 붉게, 혹은 그 무엇보다도 희게 생명을 얻는다.

낮게 더 낮게 머리를 숙이며 흐르다

무채색이나 중간색을 배제 하려는 노력들이 보인다. 강렬한 느낌들을 더 완강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지다. 강렬함은 우리의 토테미즘과 톱니바퀴로 완고하게 맞물려 원활하게 더 잘 돌아간다. 융성해 보이는 간절함이 더 붉은 간절함으로 그의 그림 안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다.

만다라 역시 기존 개념의 만다라가 아니다. 만다라가 불교의 경지인 깨달음의 경지, 또는 부처가 실제로 증험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면 그가 그려낸 만다라는 만다라 화(華)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열락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혼곤해진 달뜬 마음들이 가라 앉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순간 손을 놓게 만든다.

작가는 폐교에서 우리 미래를 위한 교육에도 힘쓴다. ‘경복미술문화원’ 그가 있는 곳의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 해 진행한다. 종이뜨기, 우드락 판화, 도자기 만들기, 토우 만들기, 석고 뜨기, 염색하기, 집단화그리기, 탈 만들기 등과 주말 가족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열정을 보인다.

“살아가는 동안 중심은 내 자신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마 이후에도 그럴 것이다. 지금보다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치열해질 것, 그림에 대해 더 성찰할 것 등이 내게 남은 과제다. 깊이 있는 작업은 자기성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의 : 경복미술문화원 ( 010-8615-6805)

프롤로그


나무가 늙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몸 웅크리고 땀에 전 자신의 등을 바람에 기대어 살아간다. 생각의 이파리들, 이미 능선 너머로 다 털어 버리고 빈가지 수없이 부러져나간 자리에 그래도 새들이 둥지를 틀고 앉는다.

벌레들이 오랫동안 살아 온 땅 밑 이야기가 수관을 타고 오르고 저녁노을 얹혀있는 둥지의 적막이 어둠이 쌓여가는 속에서 나무는 조용히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너무나 많은 말들을 바람소리에 실려 보내지는 않았는지.

몸속의 스위치를 눌러,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목각인형처럼 달궈진 만큼 빨리 식는다. 어떻게 가슴 속까지 숙이지 못하는 고개 짓으로 자신의 눈금을 마음 안에 그려 넣을 수 있을 것인가.

걸어 온 만큼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쌓인 생각들을 되짚어보며 산보처럼 걸어 나온 거리가 제법 길게 느껴진 지금, 내 자신에게 그동안 잊었던 말을 걸어본다. 발바닥의 물집은 가라앉았는지,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아직 가슴에 남아 있는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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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2009-03-07 15:51:56
제 작업이 좋은울림으로 반야보살님께 전해졌다니 고맙습니다. 아름다움을 서로 공감한다는것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요. 작업실은 항상 열려있으니 전화 주시고 오십시오. 좋은생각 나누십시다.

이석원 2009-03-07 15:17:50
범현이기자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작가로 얼굴 내민지 꽤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자긍심과 달리 드러내는일이 낯설고 쑥스럽기만 하니...꽃향기,풀내음 짙어질때쯤 마실 한번 나오십시오. 고맙습니다.

반야보살 2009-03-07 13:05:50
절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랫만에 좋은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한 번 작가를 찾아 뵙고도 싶습니다.
좋은, 깊이 있는 그림 늘 감사합니다. 폐교로 찾아가 뵈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