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역사일망정 모두가 감당해야 할 숙제”
“불운한 역사일망정 모두가 감당해야 할 숙제”
  • 오윤미 기자
  • 승인 2009.03.03 10: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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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금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 회장

3·1절 90주년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민족정신을 되새기고 순국선열에 대한 추도와 애도 물결로 일렁인다. 모두가 90주년을 애도하는 사이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다했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조촐한 10주년을 맞았다. 올 3월 1일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과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모두가 외면하는 사이 외로운 싸움을 진행 중인 이금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 회장을 만나 ‘근로정신대’ 역사를 되짚어봤다. <편집자 주>

▲ 이금주 회장은 태평양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다. “3년안에 어떻게든 돌아온다”던 남편이 전사 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오자 남은 여생을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해 살고자 결심했다. 전쟁으로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1988년 서울에서 발족한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족회 광주담당을 시작으로 내년이면 회장을 역임한 지 20년째를 맞는다.
-. 많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사람들이 ‘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를 많이 혼동한다. 열심히 활동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근로정신대는 일본의 무차별한 인력수탈을 말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조선의 어린 소녀들까지 일본 군수공장 등에 강제 동원해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겨우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을 데려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고된 일을 시키면서도 임금 한 푼 주지 않았다. 광주전남지역에서 강제 동원된 피해자만도 138명이나 된다."

-. 12, 13세라면 아직 판단력이 서지 않을 나이이다. 어떻게 일본에 가게 됐나.
"일제식민지 시대라 초등학교 교장부터 선생까지 죄다 일본인이었다. 온갖 감언이설로 돈 벌고, 여학교도 보내준다고 하니 너도나도 일본 간다고 손을 들었다. 한 반에 50, 60명이었는데 한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성적 좋고 영리한 학생들만 골라 한 반에 열 명 정도 선별했다.

뭣 모르는 애들이야 일본 간다고 좋아라 했지만 태평양 전쟁 때 아닌가. 부모들은 어린 딸 못 보낸다고 하니 “부모님 형무소에 가둔다”며 교장선생이 협박을 하고 도장을 훔쳐오게 했다. 그 어린애들한테 속된 말로 도둑질을 시키고 등을 떠밀다시피 한 것이다. 보내는 부모 심정이 오죽했겠나."

-. 일본 생활은 어땠나.
"일본 생활은 그야말로 감옥이 따로 없었다. 당시 일본에 강제 동원된 이들이 300명 가까이 됐다. 미쓰비시 사 소유의 나고야 군용 항공기 제작 공장에 배치돼 하루 열 시간이 넘게 강제 노동을 했다. 일을 하며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다.

피해자 양금덕 씨가 한 말이 있다. 일은 많지, 배는 곪지, 하도 배가 고파 자다 일어나 부엌에 먹을 게 없나 뒤져보니 먹다 남은 다꽝 쪼가리가 있길래 냉큼 집어 먹었다가 그길로 밤새 설사와 구토를 해대며 배탈에 시달렸다.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아파서 누워있었더니 감독관이 와서 안 일어나면 아침밥 없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고 하더라. 얼마나 서글펐는지…. 한 번은 복도에 떨어진 수박 껍질을 주워 먹는 걸 감독관한테 들켜서 ‘거지’라고 두들겨 맞고 욕을 먹어도 그것만큼 맛있었던 수박은 여태 없었다고 한다.

일은 일대로 고되지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장갑도 없이 휘발유를 만지다 보니 손이 뱀 허물 벗겨지는 것처럼 심하게 부르텄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육체적 노동보다 더 힘들었던 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해져 갈 때였다."

▲ 일본으로 건너간 소녀들은 배 곪으며 하루 10시간 넘게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육체적 노동보다 더 힘들었던 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해져 갈 때였다.”
-. 탈출은 생각해보지 못했나.
"감시 감독이 엄격했다. 탈출을 막기 위해 겹겹이 철창을 쳤다. 감옥이 따로 없었다. 부모님께 편지를 써도 다 검열를 맡았다. 잘 지낸다는 내용 외에는 쓸 수가 없었다. 식민지 시대를 산 우리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야만인 취급을 받으며 산 세월이다."

-. 해방 후에는 군 위안부로 오인 받아 겪은 아픔도 많았을 텐데.
"일본에서는 죽어라 강제징역에 시달렸고, 돌아와서는 군 위안부로 오인 받아 눈물로 지샌 세월이다. 해방되고 나니 나이가 17, 18세 혼담이 오갈 나이었다. ‘일본 갔다 왔다’고 하면 몸 팔고 왔다고 생각했다. 혼담이 오가다가도 끊어지기 일쑤였다.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더러운 년이라고 욕해댔다.

결혼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일본 다녀온 걸 알고 난 후부터 술만 먹으면 때리고 욕을 하는 집이 많았다. 그래서 더러는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걸 숨기며 살고 그랬다. 그래도 남들이 알까 쉬쉬하며 살아온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심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  근로정신대 문제를 물심양면 도와주는 일본 지원단을 소개해 달라.
"생각만으로도 고맙다. 내 가족을 빼곤 다 외면했는데 일본에서 저렇게 고생하고 애써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는 지난 1999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돕기 위해 일본 사람들로 꾸려진 1천여명 규모의 지원단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여태껏 물심양면 도와주고 있다. 자발적으로 년에 3천엔씩 회비를 걷어 10여년의 재판기간 동안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고들의 교통비와 체류비 일체를 지원해주는가 하면 일본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자료집과 책자를 발간해 배포해오고 있다.

지난 2003년에는 연극 ‘봉선화’를 공연했고, 2005년에는 ‘그 소녀들을 잊을 수 없다’는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지난 2007년부터는 두 시간 거리인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매주 금요시위를 벌이고 있다. "

-. 지원단과는 어떻게 연을 맺게 됐나.
"지원단 회장인 다카시 마코도 씨의 도움이 컸다. 역사 선생이었던 다카하시 마코도 씨가 태평양 전쟁 관련 조사과정에서 근로정신대 존재를 접한 후 희생자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발 벗고 뛰었다. 희생자 명단을 찾기 위해 어찌나 미쓰비시 사를 들락거렸는지 회사 방문객 출입장부를 따로 비치할 정도였다.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건물에 파묻혀 죽은 사람들 중 조선여자가 6명이였다. 희생자 중 한 명이 창씨개명을 했던지라, 한국이름을 모르니까 다카시 선생은 시신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12년간 찾아 헤맸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애덕을 가진 분이다. 그리곤 1988년 유족들과 피해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공장부지 한 켠에 위령비를 건립해 주기도 했다."

-. 소송은 어떻게 이뤄졌나.
"1999년 3월 1일, 소장을 받은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소송을 준비해오긴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 30여명으로 꾸려진 공동변호단이 몇 차례 광주를 찾아와 자료를 수집하고 본격적인 재판 준비에 들어갔다. 한 번은 일본에 초청돼 기자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군 위안부 1명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근로정신대를 잘 알지 못했던 시절인지라 일본기자가 우리를 죄다 위안부로 치부했다.

양금덕 씨가 벌떡 일어나 “우리가 왜 위안부냐,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기자들에게 고함을 치며 따졌다. 일본 기자들 모두가 놀랐지만 그 사건은 언론의 관심과 근로정신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99년 3월 1일 마침내 광주전남출신 피해자 8명의 원고가 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 재판마다 매번 기각 당했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나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 재판부는 매번 ‘한일협정’을 빌미로 기각했다. 믿었던 상고심에서까지 기각 당했다. 분개했다. 재판장도 양심이 있는지 재판이 끝나면 줄행랑친다. 비록 재판에서는 패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일본 지원단도 다른 이유도 아닌 ‘한일협정’ 때문이라면 더더군다나 납득할 수 없다고 한다. 여전히 원정 금요시위를 하며 진실규명에 앞장서고 있다.

‘한일협정’이 문제가 된다면 내용을 공개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비겁하게 먹물 칠해진 종이쪼가리를 증거라고 제시하지 말고. 현재로선 우리나라 271명, 일본 154명 등 425명으로 꾸려진 ‘일한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회’가 희망이다. 이들 단체는 외무성을 상대로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는 소송을 하고 있다. "

-. 올해 3월 1일이면 10년이다. 재판을 떠나 10년 동안 진실규명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는데 얻은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
"곧 죽어도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면 일본이 지난 2007년 처음으로 강제징역 부분을 인정했다. 당시 판결문에 “강제 연행에 의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임금도 주지 않았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모두 인정된다”며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법적 권리는 소멸됐지만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으로 인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은 져야한다”고 판시했다.

미쓰비시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지역에서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준)이 결성됐다. 늦게나마 우리들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가고 있다. "

-. 일본에는 1천명이 넘는 지원단이 꾸려져서 근로정신대 문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용하다. 더군다나 원고 8명이 사는 광주전남에서조차 이슈가 되지 못했다.
"늘 아쉽고 답답한 부분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일본 잘못이다. 우리정부도 외면하는 마당에 누굴 붙잡고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판 때마다 나서 애써주는 일본 지원단에 낯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금요시위를 하는 지원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지난 1월부터 서울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원고들은 죄다 광주전남 사람인데 서울에서 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할 때도 있다. 불운한 역사일망정 역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

-. 미쓰비시 사는 어떤 반응인가.
"미쓰비시 사는 자회사가 18개나 되는 명실상부 일본을 먹여 살리는 대기업이다. 그래서 일본정부도, 한국정부도 쉽사리 건들지 못한다. 그러나 기업윤리라는 게 있다. 법을 떠나 책임져야 할 사회적 윤리라는 것이 있는데 미쓰비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벽을 보고 얘기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

-. 더구나 2011년 발사예정인 아리랑 3호 위성발사 용역에 미쓰비시 중공업이 선정됐다.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유분수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 우호관계를 위해 근로정신대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모르겠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제 민족 인권을 유린한 일제 전범기업에게 용역을 맡기겠다는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정부가 나서 해결 촉구에 앞장서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눈을 감겠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 쉽지 않은 여정이다. 앞으로 계획을 말해 달라.
"일본에 ‘진사(陳謝)’를 요구한다. 진사는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한다. 13세의 어린 소녀들이 이제는 80살이 넘는 노모가 됐다. 어린 시절 강제노동 후유증으로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참혹했던 역사에 희생당한 숱한 이들이 여전히 숨죽이며 울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지 죄인이 아니다.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왔다.

죽기 전에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 죽는 순간만큼이라도 편안히 가고 싶다. 그것이야 말로 먼저 간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후세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올바른 역사인 것이다."

▲ 많은 사람들로부터 ‘천생연분’이란 말을 들으며 올렸던 결혼식. 그리고 2년 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남편의 소식은 전사 통지서로 돌아왔다. 생후 8개월된 아들과 함께 68년 동안 남편을 그리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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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2009-03-04 11:32:33
일본에서 2년동안 진행된 금요시위는 한국에서 먼저 했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나마 시작되었으니 잘 성공을 하여야 한일평화운동의 모델이 되어야 겠습니다.

광주 2009-03-03 11:43:46
이금주 회장님의 가슴 절절한 말씀도, 그 말씀을 인터뷰속에 끌어내는 기자님의 땀방울도 모두 훌륭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