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성시(非情城市) 혹은 슬픔의 도시
비정성시(非情城市) 혹은 슬픔의 도시
  • 최권행
  • 승인 2009.02.0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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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권행 (서울대 불문학 교수)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조용필씨가 다시 불렀던 이 전래민요가 고장난 축음기처럼 한 부분만 반복해서 떠오르곤 하는 것은,  필시 이즈음에 우리 사회가 한꺼번에 겪게 된 여러 고통스런 일들 때문일 것이다.
  
망루에 올라가 그렇게 숨져간 가난한 이들이며 경찰, 그들의 남은 식구들, 어두운 길에서 붙들려 끌려간 여성들, 그들의 남은 가족과 벗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오랜 동안 이 지상에서 도란도란 살고 싶었을 그들의 소박한 꿈이 이렇게 참혹하게 꺼져버린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약하고 유순한 여성들이거나, 기껏 내 억울한 사정을 알아달라고 소리치던 사회적 약자,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말단 공직자일 뿐이지 않은가? 
  
한 경우는 범인을 잡았다하고, 또 한 경우는 아직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전래민요가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그 역시 남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냉혈한임에 틀림없다. 이 냉혈한이 한 사람이 아니고 한 집단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 집단이 가스통을 움켜쥐고 다니는 요란한 친목회가 아니라, 어엿한 외양에 부드러운 매너와 세련된 어법을 가진 교양인들이라면? 때로는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시간에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없는 것 없이 고루 갖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진범을 잡기는 상당 기간 오리무중이 될지도 모른다.
  
겨울바람 속에 눈보라가 매섭던 이번 정월 어느 날, 벗들 두엇과 밤의 산길을 걸었다. 아득한 눈과 어둠의 산 속에서 저마다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우리는 하늘의 별 하나처럼 각자 하나의 우주였다.

그러나 저 혼자 그냥 흘러가는 별이 아니라 산속 불이 켜진 암자를 향해 함께 가는 별들이었다. 어둠과 추위가 오히려 행복하였던 것은 함께 가는 우리 사이 마음의 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룬 것에 대한 애정과 그가 마주친 어려움에 대한 연민, 말없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함께 있던 느낌은 우리를 별똥별이 아니라 성좌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이라는 우리 삶의 터전, 사회의 기초는 바로 이 연민과 공감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주 속 우리의 객관적 위치는 티끌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미한 세계 속의 무의미한 존재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삶을 하나의 공포영화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나를 저 우주와 동격의 세계로 바라보는 이웃들 덕에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온기가 생기고 사회라는 둥지를 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동정심 없는 세상’, ‘냉정한 세상’을 어찌 견디겠는가? 여기저기 틈새마다 날것의 욕망과 무지막지한 폭력이 번득이는 사회로 가는 것이 보이니, 못살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판이다.
  
‘비정성시(非情城市)’라던가,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영어로는 ‘슬픔의 도시’라는 뜻으로 옮겨져 있다. 비정한 세계라고 말하고 나면 버리고 떠나고 싶지만, 슬픔의 세계라고 부르는 마음에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를 향해 다가가는 온기가 있다. 2009년 초두, 슬픈 한국을 생각하며, 스러져간 이들의 넋 앞에 잠시 마음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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