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
‘시간으로의 여행’
  • 범현이
  • 승인 2009.01.16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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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광주미술상 수상 판화가 임병중(44)

▲ 임병중(44) 판화가
자주 지나치는 길옆, 그의 작업실이 있었다. 한 번도 그곳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생활만 가득한 무미건조한 길에 쌓여져 있는 시간들이 곧 작가의 삶이란 생각도 역시 못했었다. 앞치마를 팽팽하도록 잡아당겨 묶고 달려 나온 작가는 예전에 이미 수(手)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든다.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켜켜이 쌓아져 있는 그의 방대한 작업 분량이 작업의 성실함을 가늠하게 만든다. 단순한 작업실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져 있다. 나이테처럼 하나 둘씩 섬세할 정도로 말아져 곳곳에 누워있거나, 세워져있는 순지(純紙)에 찍혀져 있는 판화들은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시간을 되돌리는 태엽을 감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작업으로 일관해


작가는 강 연균씨가 운영하고 있는 광주미술상 운영위원회가 수여하는 ‘제14회 광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덤덤하다”며 “4번째의 도전이다. 지난해도 본상에는 올랐었다”고 말을 이었다.

“광주에서 한 점을 찍고 싶었다. 지역작가가 중앙으로 진출하기란 쉽지 않다. 넘어야 할 벽이 많다. 그 일환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인정받고 싶었고 그것이 4번이나 도전하게 만들었다”고 현재의 심정을 피력했다.

“처음부터 광주미술상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막상 상을 수상하고 나니 나 역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무엇으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미술상은 지난 1995년 광주, 전남에 연고를 둔 원로, 중견 미술인들이 후배 작가(30세 이상 만 45세미만)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특히 운영위원회는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수상자 상금을 지난해보다 2배가량 늘려 1천만 원을 지급했다.

작가 본인도 응모할 수 있으며, 제3자 추천, 운영위원 추천도 가능하다. 운영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무기명 투표로 당선자를 뽑는다. 수상자 1명에게는 1천만 원의 창작 지원금이 주어지고, 차석 2명에게도 100만원의 지원금을 수여하는 형식이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다. 미열의 혼곤함 속으로 빨려 들어가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럽고 현재가 과연 시간상으로 정확한 위치인가마저 의심스러워진다. 혹, 이미 멀리 떠나와 버린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 멀리 떠나와서 다시는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인지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혼곤해진다.

작가의 모든 작업의 모티브는 토테미즘(TOTEMISM)이다. 그가 토테미즘에 천착하기에는 ‘울산의 반구대 귀신고래 암각화’와 고대 벽화 이미지가 있었다. 그는 처음 암각화를 보고 “온 몸에 느껴지는 전율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더 많은 풍성한 수확을 염원하거나,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융성함을 바라는 기원들이 벽화에 암각 되어 있고 작가는 이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스스로의 방법으로 재해석해 고대의 시간들 위에 현재의 시간들을 점층 시키는 작업으로 일관한다.


눈에 여실히 보이는 판각된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고래, 다양한 가축, 노 젓는 사람들, 고깃배, 삼족오들이 매우 단순한 선으로 표현되지만 이미 현재의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있다.

작가는 자신이 재해석한 ‘토테미즘’시리즈 안에 시간의 점층을 표현하려 한다. 시간은 역사성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살아 온 역사들이 그 안에 피부로 살아 움직이며 나무의 나이테로 살아 꿈틀거린다. 역사와 기록이 없는 문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와 그 시간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지금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장승, 사천왕상, 미인도 등의 옛 그림들을 현대적 이미지로 재해석한다.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날아가는 삼족오는 불사조 같은 이미지다. 붉게 타올라 힘찬 날개 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차오르는 삼족오는 이미 암각의 의미를 벗어나 앞으로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 운주사의 불상 이미지도 보인다. 동글납작한 선으로 이어진 불상과 탑들이 우리 선조들의 넉넉한 선과 닮았다.

지금까지의 희망과 소망. 이 모든 것들을 담은 1M로 판각된 10장의 토테미즘 시리즈의 그림들은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는 “내가 그린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웃음을 짓는다.


역사와 시간을 눈으로 보며 손끝으로 만지다.


모든 작품에는 실험성이 엿보인다. 단지 일반적인 미술 재료만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건축에 쓰이는 재료를 즐겨 사용하며 장르에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예술을 하고 싶다. 만약 전공이 회화라 해서 회화만을 고집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은 그만큼 좁아지는 것이다”고 단언할 정도로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하고 실험한다.

돌가루, 아크릴, 수지도료 등을 이용해 자신의 그림을 최대한 표현한다. 작가는 호박(琥珀)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보석의 일종인 호박 안에는 갖가지 형태의 곤충들이 살아있는 모양으로 박제되어 있고 그가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도 그림 위에 수지를 뿌리고 굳혀 만져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낸다. 서로 당기고 밀어내는 기름의 성질을 이용해 판화의 역동성을 표현하기도 하며 재료와 기법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욕심이 많아 같은 작품의 에디션이 5장 이상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도 3년 동안 8번의 전시회를 할 정도로 방대한 작업량이다. 100호 미만의 작업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대작을 해야 작품을 하고 있구나,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작가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살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고 싶고, 하루하루를 원하는 그림을 그려가며 지금 주어졌을 때 열심히 살고 싶다. 그림이 직업이다.”

프롤로그

무한해 보이던 작업실 공간. 네 벽을 기대어 서 있던 미발표작들...
그의 방대한 작업분량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가슴 안에 선인장 하나가 솟아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자리로 순식간에 자라버린다. 몸 안에서 서로 가시로 찌르며 사고를 내 상처를 만든다.

한순간 시간을 놓았다. 거울을 꿰뚫는 시간, 공기 속으로 어둠을 모는 바람과 하늘,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은 그곳에 지는 잎새까지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겨울과 함께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창 너머 여전히 또 다른 삼족오 한 마리가 전선에 앉아 있다.

바람의 뒷녘에 앉아 있다. 뼈를 갈아세운 성(城)속으로 인광을 띄며 걸어 들어간다. 이제는 핏빛으로 짖는다. 산화된 입김이 저마다 얼굴을 내밀고 쓰러지고 뼈 틈으로 솟아난다.

문의 : 010-6502-8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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