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섬이다”
“그녀는 섬이다”
  • 범현이
  • 승인 2009.01.02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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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과 자개를 접목한 한지공예가 민은주(44)

▲ 한지공예가 민은주.
그녀는 섬이다. 도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진 아무나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섬이다. 밤이면 화들짝 요란한 빛을 발하는 상가의 불빛도, 무언가에 쫓기듯 앞을 보며 달려가는 사람들도 민 은주씨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체다. 투명이다.

섬 주변을 덩그러니 둘러싸고 있는 파도치는 물결도 그를 누그러트릴 수 없다. 그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섬에 스스로 빗장을 걸어두고 들어앉았다. 오로지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다.

시간의 흐름도, 세상의 막막함도, 번잡함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상이 그를 비켜가는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세상에서 물러 선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문을 달아두지도 않아 밖으로 나오기도 쉽지 않은 자신만의 섬 안에 십 년이 넘게 들어앉아 눈멀고 귀 막은 채 오늘도 한지를 조각한다.

단지 한 장의 종이였던 한지가 그의 손끝에서 빛나는 찬란한 생명을 얻어 작품으로 태어난다. 그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마고할미의 손을 가졌다.

처음 한지를 만나던 날을 기억해

처음부터 한지 공예를 하려고 생각하며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손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이 좋았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열정이 그를 한지로 내몰았다. 한지에 스스로 흡수된 것이다.

“세상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곤하지만 한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으며 거짓이 없다. 담백하고 진실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천생 예쁘게 웃는 체구 작은 여자다. 작품의 사이즈를 보면 너무나 당차고 거대해 이 작은 체구와 손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가 안갈 정도다.

시류이기도 하였지만 처음 한지와의 시작은 닥종이인형을 만나고서였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형상의 닥종이인형 작업에서 곧 막다른 한계를 맛보았고 우연히 방문한 친구 집에서 완성이 되어있는 한지 공예품을 만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도 이제 막 한지공예를 배우던 초보였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이 왔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며 누군가가 한지의 세상으로 자신을 던져버린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말한다.

한지로 생각하고 한지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길로 지금까지 한지만을 생각하고 한지만을 이용한 작업의 연속이다. 이미 그녀는 몸 전체가 한지로 변해버렸다. 한지로 이루어진 익숙한 몸통이다.

한지는 우리 민족만의 종이다. 천년이 지나도 색감도 질감도 변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종이다. 그녀는 천년을 지탱하는 한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받아 자신 역시 한지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만들어낸다.
한지의 특성에서부터 종류, 성향, 색깔까지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한 후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한 가지 색을 편식하지도 않고 유행이나 흐름을 따르지도 않는다. 누군가 왜 이렇게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기꺼이 ‘그냥 내 마음이 이것을 원해서’라고 말할 정도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낸 작가의 작품은 어디서나 곧 돋보인다. 빛의 찬란함이 돋보여 보는 사람들이 넋을 잃는다.

작가는 순식간에 거의 모든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화려한 수상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대상, 전라남도 대상 뿐 아니라 10여개가 넘는 수상경력 등이 그가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준 대가다.


스스로 헤엄쳐 바다를 건너다

고통과 번민도 많았다. 생활은 늘 작가의 발목을 잡았고 일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생활을 하기 위한 미술학원에서도 늘 한지가 머릿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지만 온전하게 하루를 투자할 수는 없다.

견디는 방법은 늘 하나다. 부딪혀 깨지거나 완전하게 몰입하는 것. 작가는 늘 밤을 새며 새벽을 작업실에서 맞는다. 회화를 전공한 남편인 조 영준(46)씨는 “보기에도 짠할 정도다.

하지만 그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기에 최대한 배려하며 돕는다”며 “때때로 색감이나 디자인 등을 같이 의논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남편이 곁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남편은 오히려 “미술대학 수석 졸업자는 민 은주”라며 손사래를 친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한지가 좋다. 구기면 구겨진 대로 찢으면 또 찢어지는 대로 고유의 감각과 느낌을 자연스럽게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며 “이제 시작일 뿐이다”고 말을 잇는다.

한마디로 그녀의 작품은 독특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한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녀의 작업 안에는 항상 홍송과 전통의 짜 맞춤 장인인 소목장이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가구의 뼈대를 이루는 과정까지도 장인정신으로 맞춤식이다. 이미 만들어진 장인 가구에 다시 자신의 색을 덧입힌다.


옻칠과 한지, 자개와 한지, 금속과 한지의 특별한 만남


날을 새며 새벽까지 판각한 한지들을 모아 소목에 옷을 입힌다. 간단한 것 같지만 그녀가 입히는 한지는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다. 한지에 풀을 바르고 말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후 덧 입혀진 한지는 조각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두께가 되고 비로소 그것을 판각한다.

조각이 되면 다른 색색의 한지를 덧대고 다시 말리는 작업을 한 후 색과 조각이 어우러지면 비로소 소목 위에 한지 옷을 입힌다. 물론 이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자재를 붙이거나 옻칠을 하기도 하고 명인이 만들어 낸 금속장식까지 달면 작품 하나가 드디어 완성된다. 길면 2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날을 새는 것은 다반사다. 한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모티브가 또 생각이 나고 새로운 작품을 디자인하고 다시 제작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요즈음 작업은 한지에 금을 입혔다. 문갑 세트 위에 입혀진 화려한 색감의 연꽃은 붉은 색의 한지 위에 하얀 반투명 한지를 일일이 찢어 붙여가며 만들어낸 연꽃 세상이다. 가구 내부의 붉은 색이 단풍잎처럼 붉다. 반짝이는 금과 어울려 화려함의 극치다.

십 년 넘은 작업이지만 전시회 한 번 한 적도 없다.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아까워 방 안에 보자기를 덮어두고 혼자서만 몰래 살짝 보곤 한다”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간다.


프롤로그


사람들을 제각각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갈 이유를 찾아낸다. 망상에서 혹은 자만에서 자신의 삶을 끌어안으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예고된 운명은 없다. 어느 날 골목을 돌아서며 우연히 맞닥트리는 운명은 이미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잠식해 버리는 이유다. 아마 그녀도 그랬으리라. 한 번도 생각지도 꿈꾸지도 않았던 한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삶에 뛰어 들었고 결국은 눈을 떠서 뿐이 아닌 잠자는 시간까지 완전히 모든 것을 장악해 버렸다.

한때는 내게도 날개가 있었으리라. 지금은 슬픈 흔적만 남아 있으나 꿈마다 푸른 하늘로 쏘아 보내는 튼튼한 날개, 아아 그러나 깨어보면 나는 언제나 날개를 접고 희디 흰 벽에 걸려있을 뿐이다. 날아가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 올 뿐이다.

문의 : 062-943-9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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