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러 목포로 가는 길은 이제 익숙하다. 작은 키, 느릿하고 어눌한 말솜씨. 하지만 언제나 말을 하는 쪽은 그고 무심한 듯 앉아 열정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 작업실 창밖으로는 목포의 유달산이 알몸으로 눈이 시리다.
져가는 노을이 창밖, 자줏빛으로 붉다.
온통 황토를 주조로 한 그림들이 세워지거나 벽에 기대인 채로 여러 겹 포개져 남도를 보여준다. 노을빛과 맞물린 작업실 풍경은 음울하고 남도의 황토 빛 그림들은 먼지처럼 부유해 서로의 피부에 녹아든다.
분명 평면인데도 자꾸 바라볼수록 살아 움직인다. 작업실 안 그림들이 연리지로 얽혀지며 한 몸이 되어 서로 숲을 이루고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주며 더 많은 길을 내어준다.
‘자. 가고 싶은 길을 걸어보아라. 우리의 선조들이 걸어왔던 길을 걸어가 보아라. 여기가 네가 살아온, 살아 갈 땅이다’고 말을 건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 온 것일까. 앞으로 걸어가야 할 자기만의 고유한 길은 저 많은 길들 중 어느 길일까. 구부러진 길들이 일직선으로 굴곡 많은 시간 안으로 녹아든다. 가슴을 친다.
남도의 황토 빛이 화폭 안에 자리하다
그가 그리는 평면 작업 중에는 유독 많은 길들이 보인다. 그냥 눈에 보이는 자그마한 길이 아니다. 길은 망설이지 않고 길로 이어져 새로운 길로 연결되고 그 길은 다시 새로운 길과 만나 삶의 길을 만들어내는 길이다.
어린 날 숨바꼭질로 익숙해진 길,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길 안에서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하다. 눈물이 날만큼 정겹다. 어머니의 눈빛이 보이고 언제나 내 편만 들어주던 형제들의 무조건적이던 역성도 들린다.
영암에서 태어난 작가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다. 남도를 안고 도는 어머니의 강인 영산강과 작가가 거주하고 있는 목포와 유달산을 오르는 좁다란 골목길도 그가 자주 그리는 그림의 주제들 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산수화 기법이 아니다. 산과 산으로 이미 가려져버린 길들도 화폭 안에서는 통통한 본연한 자기모습으로 만난다. 그림을 이해하게 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간 소통이다.
보여 지는 산의 한 면만이 아니라 산 이쪽으로 가려진 저쪽의 풍경까지 담아냄으로서 원근법이나 한 시점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풍경화를 온전히 거부한다. 이 화법은 오히려 그의 그림을 투시할 수 있도록 시간의 투명함을 갖게 한다.
앞산에 가려 안 보여야 할 뒷산이 자세히 보이고 이어지는 길까지 분명하게 보이는 그림이 전혀 낯설지 않다. 생경스러움이 더 그림 앞으로 다가가 더 자세히 살펴보게 한다.
“우리의 공간 시점은 자연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들어와서 이리저리 위아래를 훑어서 보는 다양한 시점 공간이다. 서양처럼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이동하는 시선이다. 원근은 위 아래로 바꿀 수 있고 좌우로 전개할 수 있다. 이 점들은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상상력에서 얻어진다”고 미술 평론가 원동석은 말한다.
언제나 멀리 있어 더 가까운 우리네 마음이여
2002년에는 ‘남도의 길과 동네’라는 주제로 목포문예회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무안, 해남, 일로, 영암, 함평 등 남도의 후덕한 인심 가득한 동네어귀를 돌며 남도만의 향수를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불혹의 나이가 되면 꼭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야겠다는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장영준 큐레이터는 “한국 전통 산수화의 현대적 모색을 꾸준히 해 온 작가는 한국화의 독자적 실험정신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전통한지에 자연 염료를 이용한 토속적 정서와 풍치가 어우러진 질박한 화면을 선보인다. 고향에 대한 근원적 생명감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먹색, 갈색, 황토색 등이 중심이 된 사람냄새 나는 소박한 색채대비를 통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향기가 짙게 느껴지는 시각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 시각에서 출발한 작가의 산수는 이런 점에서 특이하고 주목한다. 그는 남도의 자연을 여기저기 돌아보고 작은 그림은 현장에서 바로 붓을 가지고 그린다. 대개가 연필 스케치를 하는데 반해 그는 전통적 방식 그대로 익숙한 붓놀림을 한다. 잘못된 그림은 수정도 불가능한데 그의 붓질은 거침이 없다. 그만큼 집중력이 뛰어나다.
“전체를 보며 마음으로 그리려 노력한다. 발로 직접 찾아다니며 그린다고 해야 옳겠다. 여러 장의 꼼꼼히 스케치해 마음 전체에 담아둔다. 이 모든 것들이 기초된 것들이 내 그림이 된다”고 작가는 서슴없이 말하며 자신의 그림은 발로 그린 그림이라고 강조한다.
그림, 문학을 그리다.
전남대 예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졸업한 후 전업 작가로 일관했다. 2006년에는 그가 함께했던 기획 전시가 책으로도 엮어져 나왔다. 북촌미술관이 기획한 '그림, 문학을 그리다' 전을 기념하여 출간된 같은 제목의 책 <그림, 문학을 그리다>가 바로 그것이다. 첫 장을 펼칠 때부터 문학의 향기와 미술의 그윽함이 한껏 풍겨 나온다.
문학과 그림이 상존하는 책.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이 책에는 작가 조병연을 포함한 화가 33인과 고은을 포함한 문인 42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읽은 작품들이지만 그것이 그림과 만났을 때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처음 접해보는 작품을 대하는 듯 신선함과 새삼스러운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갖는다. 100호 이상의 대작을 포함한 30여 편 이상을 우리에게 열어 보인다. 역시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작업실을 압해도로 이사한다. 이제는 다시 시간의 길을 재해석 하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똑같은 풍경을 보아도 내 눈에만 보이는 풍광을 그려내며 나만의 색깔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길은 시간이고 삶이며 역사다. 그림 안에서 만나는 길은 작가 자신이다.
에필로그
유달산 산자락 한쪽, 선술집에서 내려다 본 목포의 밤하늘은 먹빛으로 아름다웠다. 적당히 취기가 돌며 바라보는 불빛들. 불빛 하나에 그리운 사람의 얼굴 하나씩이 생각났다. 모두가 돌아갈 등불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다행스러운 축복인가. 등불 하나에 방 하나, 얼굴들 하나가 흔들리는 눈빛 안으로 처연하게 들어와 눈초리에 물방울로 매달렸다.
<나는 늘 감옥에 갇혀 / 마른 꽃처럼 삽니다 // 조석 매운 언어들이 / 흙바람을 일으키고 // 견고한 창살 만들고 / 습관처럼 / 매달렸습니다 // 어느 날 내 몸뚱이가 눅눅하게 젖어있음을 // 우물보다 더 깊은 / 내면의 눈물통 하나 // 햇빛에 바짝 말립니다 / 마음의 문 / 끄르고 - 앵무새. 박현덕作 >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시인이 되었을 거라 말한다. 시인들은 여건만 허락했으면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그림과 시는, 화가와 시인 서로에게 가고 싶은 길이다.
본래 글과 그림은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등뼈가 하나뿐인 샴쌍둥이처럼.
일시 : 11월 21일(금)~27일(목)
장소 : 해남문화예술회관
문의 : 011-9615-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