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애당초 이런 사색꺼리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경쾌하고 산뜻한 잡담이든지 아니면 시시껄렁한 연애담을 말장난으로 알콩달콩 엮어가는 수다려니 지레짐작했다. [외출]뒤에 손예진을 좋아했고, 그녀의 벗은 몸도 슬쩍 훔쳐보고도 싶었고, 내 ‘바람끼 충동’을 이 소설의 젊은 상상과 비교해 보고도 싶었다. 이미 소설과 영화를 얕잡아보는 ‘오만’을 깔고 만났다. 오만이 깔리면, 영화에 빨려들지 못하고, 영화를 관찰한다. 그런 건방짐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엔가 난 그 영화에 빨려들어 있었다. 감독이 누구지? 정윤수? 감독을 전혀 몰랐고, 관객 삐끼용 예고편으로 그의 ‘범상치 않음’을 놓쳤다.
이 영화는, 여자가 남편에게 버젓이 애인이 있다면서 “당신도 사랑하고 그 남자도 사랑한다. 그래서 결혼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하소연한다. 더구나 “당신과 이혼하지도 않고 ··· ” 포스터나 홍보물로 그 내용을 이미 알고 본 영화이지만, 막상 그 장면을 만나니, 저절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하· 하· 하· 하· 아니, 어떻게! 아~니 어떠케~! 그것도 “그게 뭐 어때서 ··· ”라는 태도로 “누가 별을 따 달레? 달을 따 달레?” 이건 발칙한 게 아니라, 어처구니없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도 소설이고 영화니까,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다 한들, 기발하다고 할지언정 놀랄 꺼까진 없겠다.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주제에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섬세하고 짜임새 있게 잘 입혀서, 마치 진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듯이 실감나도록 이끌어가는 솜씨이다. 그래서 남자관객들은 많이 불편해 하고 황당해 하면서, 많이들 ‘Bad 영화’라며 비난할 법도 하다. Good 영화인지 Bad 영화인지는 접어두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자관객들이 더욱 불편해 하거나 더욱 황당해 하며 신경질을 부릴수록, 이 영화가 더욱 Well-made하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토록 황당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 사이사이 이음새가 자연스럽고 그 이음새를 잇는 대사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때론 기발했다. 자질구레한 터치에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가 맛깔나게 자리잡았다. 게다가 음악도 그 이야기 그 자리에 꼭 들어맞게 흘러들어 화면을 이끌어간다. 손예진이 '그 여우같은 아홉꼬리'를 간질간질 흔들어대며 살살 녹인다. 김주혁은 ‘모지리 남자’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모든 게 Cool~하다.( 마무리가 좀 억지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주제가 워낙 황당하기에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겠다. )
* 경쾌 산뜻 쌉쌀한 성(性)담론
이렇게 시대상을 비꼬고 저항하는 메시지는, 자칫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자기만의 오기로 훈계하기 쉬운데, 전혀 그러하지 않고 가벼운 산책하듯이 끌고 가는 게 사뭇 인상적이다. 꽤나 시니컬한 대목도 가벼이 농담하듯이 휙 스쳐 지나간다. [베터 댄 섹스]가 섹스와 섹스 사이로 흐르는 질펀하고 낯 뜨거운 비밀을 산뜻하고 경쾌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에 상쾌한 감동을 먹었다. 이 영화는, 그런 상쾌함에다가 남녀 사이에 흔히 끼어드는 구질구질한 비겁함도 까발리는 쌉쌀함까지 곁들여 있어서 더욱 좋았다. 대단한 내공에 솜씨 교활한 외공까지 갖추었다. 깜짝 놀랍고 너무 부럽다.
우리 사회의 섹스 개방이 지나치게 문란하고 천박해졌는데, 그 시궁창 속에서 이토록 깔끔하게 빛나는 진주알을 품은 작품이 나타났다. 포르노는 순전히 남자 입장에 서서 여자에게 일방으로 퍼붓는 모독이다. 이 영화는 정반대로, 순전히 여자 입장에서 남자에게 일방으로 날리는 뺨다구이다. 이 정도 뺨다구야 앙칼진 암컷의 질투로 소주 한 잔에 담아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일부일처제의 신화]라는 책에 기대어 좀 더 진지하게 사색해 볼만한 소재이기도 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 못지않은 충격이다. 영화는 가볍게, 사색은 진하게.
대중재미 A · 영화기술 A · 삶의 숙성 A. 점수가 A0와 A+ 사이를 왔다갔다 헷갈린다. 대중재미는 ‘신경질난 남자관객’ 때문이고, 영화기술과 삶의 숙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주제’ 때문이다. 이토록 황당한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하는지도 헷갈리고, 이 높은 점수도 소설가에게 돌려야 할지 영화감독에게 돌려야할지 헷갈린다. 소설을 꼬옥 만나보고, 이 감독의 다른 영화도 꼬옥 찾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