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의 감과 단풍이 유난히 붉은 이유
영동의 감과 단풍이 유난히 붉은 이유
  • 전고필
  • 승인 2008.11.0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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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노근리와 강선대

▲ 무거운 영동의 기운만큼 하늘도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이름만큼 기운이 센 강선대는 제 그림자를 물속에 단단히 고정해 두고 있다.

감은 제 몸이 영글기 위해 나뭇잎을 날려 보낸다. 잎이 사라지고 난 감나무에는 붉은 가을이 열리고 푸른 하늘은 더욱 깊어져 간다.
  
충북 영동은 그렇게 다가왔다. 시내를 관통하는 중심가의 가로수가 감나무였다. 그저 상징적인 감의 주산지라는 이미지 보다는 가로수로 식재된 감나무에서 그들 스스로는 제 고장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읽혀졌다.
  
불우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언어와 상징으로도 부족하여 자꾸만 물질을 그 앞에 내세우려 한다.
  
그런 영동의 관광안내도에 등장하지 않은 곳을 찾았다. 왜 관광은 아직도 지난 시대의 암울함은 지도에 등장시키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상처는 감추기 보다는 드러내서 함께 치유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광주의 5월 항쟁유적을 제외하고는 국가의 권력에 의한 학살 현장은 도무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도 마찬가지이다.
  
제 땅에서 누대로 땅을 일구며 살아왔던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전쟁이 일어났으니 소개하라며 피난을 강권하여 길을 떠나게 한 후 그들을 길 위에 세우더니 기총소사로 한 곳에 몰아붙여 철길 아래 쌍굴다리에 4백여명을 옴짝 거리지 못하게 하고 60여시간에 걸쳐 학살을 하였던 공간이다.
  
그들을 학살한 이들은 북한군도 우리 군도 아니었다. 그들은 1946년 8월 15일 해방1주년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화순탄광 노동자를 너릿재에 토끼몰이 식으로 몰아서 학살을 자해했던 동일한 사람들, 바로 미군들이었다.
  
홍시보다 붉은 피로 얼룩졌던 그날을 말씀하신 분은 당시 열세살 먹은 정구호(71)씨로 당신의 어머니가 총을 받아주어 그 밑에서 숨 하나 쉬지 않은 채 지내다 살아남았다 한다.
  
▲ 살아남은 그는 생생히 그날들을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4백여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그런 그의 증언을 들으며 다시 생각해 본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바로 화순의 일들이 그 증표이다. 이제는 너릿재 사건을 증언할 이들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다.
  
노근리는 다행히 살아계신 분들이 있고 AP통신을 통해 세계를 경악하게 하고 목하 미국에서 이 사건의 진실과 그에 따른 보상과 관련하여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참혹한 현장을 보고 다음 일정을 위해 영동의 금강변에 여정을 풀었다. 송호국민관광지라 불리는 그곳의 밤은 수많은 가족 여행객들과 단체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밤은 어둑하여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터라 아직 다 전해 듣지 못한 노근리 사건 이후의 삶과 인접한 지역의 유사한 사건을 청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간밤의 충격적인 얘기들의 여운이 금강변의 아침 안개로 차 있었다. 송호의 숲은 안개의 무거움이 나뭇잎을 내려놓았는지 단풍이 뒹굴고 있었고 양산팔경의 하나라고 하는 강선대의 모습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하는 맞은 편에 서 보았다. 비틀거리며 바람의 방향대로 살아온 소나무는 비탈진 산자락의 밭고랑처럼 그렇게 떼를 지어 서 있었다.
  
안개가 끌려가며 내 놓은 아침 강변에는 무수히 많은 돌들이 세수를 한 듯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리고 나는 그 돌들의 사각거림을 들으며 어디엔가 있을 선녀를 찾아 강선대로 강선대로 향하였다. 말갛게 보여질 강선대를 기대하였건만 아직 선녀의 목욕이 끝나지 않았는지 안개는 강변의 아래 위를 홋청처럼 덮고만 있고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옛날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그곳에 전설 한토막이 내려온다.
  
선녀들의 아리따운 모습에 혹해 버린 이무기가 승천을 하다말고 그녀들을 보아버렸다고 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린 이무기는 결코 용이 될 수 없었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추락하여 금강속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바위를 용바위라 부른다. 아마도 될 뻔 했던 것을 되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함께 담아 작명한 것이리라 싶다.
  
아침 식사를 위해 숙소로 돌아오려다 보니 간밤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던 분들이 깨어난다. 저런 평화스러움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치욕의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해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되새겨 본다. 영동의 감과 단풍이 유난히 붉어 보이는 날 어쩌지 못하고 길 위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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