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同’을 꿈꾼 유학자
‘大同’을 꿈꾼 유학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10.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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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참여자치정보센터 이사장)

1587년 2월에 왜군들이 왜선 18척을 이끌고 와서 전라도의 손죽도와 선산도 일대에서 수백 명의 백성들을 살육하거나 포로로 붙잡아가는 정해왜변이 일어난다.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훈련된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가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귀향한다. 

바로 이 ‘대동계(大同契)’는 정여립이 1586년 전북 진안에 있는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조직한 민간군사조직이다. 대동계원들은 평시에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하면서 지내다가 매달 보름이 되면 천반산 아래 모여 깃대봉에 ‘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아두고 정여립의 지휘아래 활쏘기 등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동계원들은 신분과 직위에 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하층민으로 천대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무술이 뛰어나거나 재능 있는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길삼봉과 정팔용과 같이 무술에 뛰어난 인물과 운봉의 승려 의연, 도잠, 설청과 해주의 지함두 등 학식과 능력이 특출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정여립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했다. 

계략에 호남 인물들 대거 희생

정여립은 주역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운세를 파악해본 결과 경인년(1590년)과 임진년(1592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리라 예측하고, 남명 조식처럼 왜란에 대비하고자 ‘칼을 찬 유학자’였다. 

대동의 출전은 <예기> ‘예운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대동’이다. 이때의 동(同)은 사람들이 장막 안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로 평과 화를 뜻하며, 대동사회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즉 ‘천하는 가문의 사물이 아니고 만인의 공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도학적 경세가였던 정여립의 ‘대동’의 꿈은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비밀장계와 서인인 정철 등의 계략에 의해 임진왜란까지 장장 3년에 걸친 기축옥사로 이어진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호남의 인물들은 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 결과 이 사건은 호남지방의 진보성향을 가진 선비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문적으로는 노장적인 성격을 지닌 남명의 후계자들과 개혁 지향적인 서경덕의 후계자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지역적으로는 기호지역에 사는 서인들인 이이 후학들이 가해자가 되고 호남지역에 많았던 개혁적인 동인들은 피해자가 되었다. 

민생민주국민회의(준)에 거는 기대

당시 조정에서는 동서로 나뉘어 대신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비난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탐관오리들이 들끓었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게다가 연이은 흉년과 민란, 여진족과 왜구의 침탈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뜻이 있는 선비들은 유가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대동’을 꿈꾸며 도학적 경세가로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칼을 찬 유학자’가 된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발생한 신자유주의 위기의 불똥은 세계 각처로 튀고 있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금융 및 실물경제의 위기 가능성을 점치고 있고, 우리의 일반 시민들은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개혁·진보세력들은 오직 단편적인 정책비판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거대한 촛불민심의 바람을 그물 같은 몇 개의 조직으로 가둬둘 수 있겠는가? 대동은 대동소이, 대동단결, 태평성세라는 의미로 쓰인다. 대동은 소이(小異)에서 출발한다. 마침 전국적으로 ‘민생·민주 국민회의(준)’가 공식 출범하였다. 대동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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