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노먼 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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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10.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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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맺어준 특파원과의 인연

이 글은 본지 <경제칼럼> 필진 중 한 분인 이재의 나노바이오센터 원장의 8월 18일자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비롯됐다. 19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외신기자로 만났던 두 사람의 해후로 얘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그 ‘특별한 만남’에 얽힌 사연이 궁금했던 편집국의 요청에 이 원장이 답글 형식으로 보내온 글을 싣는다. 필자는 우연같은 만남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편집자 주>

그에게서 만나자고 짤막한 이메일로 연락이 온 것은 지난주였다. 두어달 전 내가 보낸 이메일에 대한 회신 형태였다. 6.10항쟁 기념일을 전후해 촛불집회의 장엄하고 화려한 풍경은 혼자만 가슴속에 담고 있기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메일링 리스트에 들어있던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국의 지인 몇 사람들에게 ‘What is happening in Korea'라는 제목으로 촛불집회 장면을 담은 사진을 링크해서 보냈던 것이다. 내가 보낸 이메일 사진을 보고 짤막하게 즉각 관심을 표명했던 몇몇 사람의 명단 중에 그는 끼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2달 뒤 그에게서 느닷없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양쪽 부부가 함께 만나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서남해안포럼에서 마련한 하계 회원연수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겸 주말(금요일)에 신안군에 있는 섬 자은도로 가족과 함께 2박3일의 여름휴가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출발 일정을 하루 연기하기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나는 아내와 함께 광주시내 모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Norman Thorpe. 그의 부인은 충북 제천이 고향인 한국인이었다. 한국을 좋아하던 그는 1970년대 초반 'Asian Wall Street Journal' 특파원으로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부인과는 그 때 만났다. 1남1녀의 자녀를 둔 그는 자신의 고향인 미국 서부 와싱턴주 스포켄이라는 인구 50만여 명의 자그마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특파원생활을 청산한 뒤 한 때는 스포켄에서 신문사를 차려 사업에도 꽤 성공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자녀들도 모두 성장했기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 노후생활로 제2의 인생여정을 보내고 있다.

그의 부인은 스포켄과 자신의 고향인 인구 15만명의 자그마한 도시 충북 제천 사이에 자매결연을 맺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매년 양 도시의  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한다. Mr.Thorpe는 취미삼아 시작한 한국근대사와 관련된 다양한 옛 사진을 꽤 많이 수집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스포켄에서 대학 겸임교수로 한국현대사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저런 인연 덕택에 한국외국대학에서 이번 여름방학 한 달 동안 강의를 맡아 한국에 연수 온 학생들 40여명을 데리고 충청도를 경유해서 광주까지 여행을 온 것이다.

1980. 5. 22 오후 3시 무렵, 전남도청 상황실. 난 그때 도청 상황실에서 이런 저런 일을 챙기고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도청은 공수부대가 막 물러간 뒤라 매우 혼잡스러웠다. 바닥에는 최루탄, M16자동소총, 무전기,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나뒹굴었다.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시민들의 시신이 관에 실려 도청으로 하염없이 옮겨져 오고 있었다.

계엄군이 막 퇴각한 도청에 아침 일찍 들어갔던 나는 이 엄청난 사태를 맞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무렵 장동 로타리 청산학원 부근에 자리 잡았던 녹두서점은 우리 같이 이제 막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은 학생들에게는 아지트와 같았다. 서점 주인 김상윤 선배는 이미 5일전 5.17일 밤중 군 보안기관에 갑자기 연행돼 없었지만 형수 정현애 선생님께서 선배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5.22일 아침 우리 몇몇은 자연스럽게 녹두서점에 모여 계엄군이 물러간 이후 대책을 논의했고, 그 결과 나를 비롯한 5~6명의 운동권 학생들이 먼저 도청에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혼란스런 도청 상황실의 나름대로 질서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들어간 몇몇 지인들과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참이었다. 상황실 안에 있는 모든 전화기를 내 책상 앞에다 모으고, 군대에서 통신병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해 퇴각중인 계엄군들의 무전교신 내용을 파악하였다. 지원동과 화정동 쪽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붙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청에서 급조된 지원 병력을 그 지역으로 보내는 등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계엄군은 어느 순간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올지 모르는 예측불가 상황이었다. 분노와 슬픔에 싸인 비장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두려움이 우리를 파도처럼 엄습해오곤 했다. 이 엄청난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후 혹은 운이 좋다면 며칠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몸뚱이도 아마 누가 쏜지도 모른 총탄에 맞아 저렇게 처참하게 두개골이 삐져나온 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져 있을 것 같다는 두려운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 공포 엄습하던 도청 찾은 특파원

   
▲ 계엄군의 반격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전남도청을 찾은 외신기자는 고립된 광주를 유일하게 외부세계에 알릴 생명줄과도 같았다. 사진은 1980년 5월 24일 시민군 운구반원들과 유가족이 시체를 수습해 전남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5.18기념재단 刊)’
“외신기자가 찾아왔다.”

누군가 내게 작달막하고 섬세하게 생긴 하얀 머리의 외국인과 통역을 동반한 두 명의 사람을 내 앞으로 데려 왔다. 반가웠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이 사람이 5.18을 취재하기 위해 광주에 첫발을 디딘 기자였다. 정말 반가웠다.

이 사람이 혹시 미구에 닥칠지도 모를 우리의 죽음을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홍콩 특파원이라고 소개했다. 한 시간 남짓 지속된 그와의 인터뷰 도중 나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차분하고 여리디 여리다고 느꼈다.

“몇명이나 죽었습니까? 사망자 신분은 확인이 되고 있나요?”

“앞으로 어떻게 상황을 대처할 생각입니까?”

“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봅니까?”

“정부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싸움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당신은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난 대충대충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해주면서 우리의 절박한 심정을 전하고자 애썼다. 나도 그에게 물었다.

“지금 취재하고 있는 이 기사가 언제 어떻게 보도됩니까? 내가 말한 그대로 기사에 나옵니까?”

“당신은 안전하게 이 기사를 송출할 수 있나요?”

“미국정부도 이 기사를 보겠지요? 미국 당국자들이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 것 같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마치 물 속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고 싶은 심정이 역력히 배 있는 질문이었다. 물론 마지막 나의 질문에 그는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외신기자란 외따로 고립된 섬과 같은 광주를 유일하게 외부세계에 알릴 수 있는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외부에다 우리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날도 종일 도청내의 모든 전화기를 붙잡고 외부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총리실 직통으로 연결된 행정망 전화 한 개 외에는 모두 불통이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이었다. 그로부터 28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그때 겪었던 ‘고립감’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의도적인 배제’나 ‘왕따’에 의한 ‘고립감’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지....  

억울하고 참담했다. ‘이 상황의 본질을 당신이 정확히 꿰뚫어보고 반드시 세계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나와 인터뷰가 끝나자 전남대 병원에 가서 사상자를 확인해보아야겠다면서 통역과 함께 도청 상황실을 황망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대부분 기자들과의 취재원과의 인연은 그렇게 일회성으로 끝나게 마련이니까...

▲ '5·18특파원 리포트'로 극적 해후

1997년 5월 17일.  그로부터 딱 17년 뒤 그와 광주에서 다시 만났다. 5.18 17주기를 맞아 광주시민연대모임에서 발간한 ‘5.18특파원리포트’(풀빛, 1997)가 인연의 끈을 맺어주었다. 이 책은 한국기자협회, 무등일보, 시민연대모임 등이 공동으로 ‘17년 만에 공개된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5월민중항쟁 취재수첩’이라는 부제로 나왔다.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지금 캄보디아에서 생활하고 있는 서유진님의 덕택이다.

시민연대모임은 5.18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광주항쟁을 직접 취재한 내외신 기자들의 회고담은 국제사회에 5.18의 진상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기획 아이디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17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제 뿔뿔이 흩어져버린 내외신기자들을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는 점과, 그들이 실제로 글을 써줄지, 그리고 만약 글을 쓰더라도 그 특파원들의 시각이 우리의 편집의도와 맞아 떨어질지는 전혀 미지수였다.

서유진님은 미국에서 오랜 민주화운동을 하던 과정에서 평소 자신과 잘 알고 지내게 된 ‘볼티모어선’지의 브래들리 마틴 특파원을 만났다. 브래들리 마틴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인도의 인디라 간디수상 암살이후 폭동 살인사건 등을 취재한 베테랑 아시아지역 취재기자였다. 그는 이 책에 쓴 자신의 원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녀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직접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특파원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윤상원의 죽음을 지울 수 없어 1990년대 초 서유진님의 안내로 광주를 다시 찾았고, 윤상원을 회상하는 글을 다시 썼던 인물이다.

“나는 광주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코 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서유진님은 브래들리 마틴을 통해 그때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기자들을 찾아내보자고 제안했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세계 이곳저곳을 직접 돌아다니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세계인의 시각에서 광주항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이 책의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다. 3월말까지 원고를 마감시키고 번역까지 완전히 끝낸 상태에서 5월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글본과 영문본 2가지 종류의 책자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었다. 원고가 생각처럼 쉽사리 수집되지 않았다. 서유진, 브래들리 마틴을 통해 접촉이 이루어진 외신기자들의 원고를 수집한다는게 쉽지 않았다. 모두 자신들의 취재인생에서 광주는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구체적인 사건과 날짜, 장소 등을 소상하게 기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외 없이 원고를 써서 보내주었다. 그만큼 그들에게도 광주의 경험은 자신들이 취재했던 어떤 사건보다 강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 때 혹시나 5.18 당시 도청에서 나와 만나 인터뷰를 했던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지 기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그는 원고 마감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3월말 번역까지 끝난 최종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초쇄본 교정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브래들리 마틴에게서 연락이 왔다. 또 한사람 꼭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브래들리 마틴이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온 특파원은 ‘Asian Wall Street Journal'의 ‘Norman Thorpe’라는 사람이었다. ‘엊그제 LA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지금 그가 원고를 쓰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직접 그를 접촉해보라는 당부였다. 

나는 브래들리 마틴이 보내온 Thorpe의 연락처인 미국으로 즉각 다이얼을 돌렸다. 다소 흥분됐다. 혹시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 28년만에 처음으로 지난 8월 망월동 묘역을 찾아 자신이 데리고 온 외국인 학생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노먼 토프. 그는 1980년 5월 20일 항쟁을 취재하기 위해 최초로 광주를 찾은 외신기자로 당시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었다.

▲ 5·18이 맺어준 국경 넘은 우정

“저...혹시 저를 기억하실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80년 5월 22일 오후 도청에서 아시안월스트리트 기자와 인터뷰를 한적이 있었는데....혹시 당신이 그분 아닌가요?”

수화기의 주인공은 나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다소 당황한 듯 머뭇거리더니 1시간쯤 후에 다시 통화를 하자고 했다. 너무 오래된 일인데다, 그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그 시각쯤 도청에 들렀던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그때 적어놓았던 자신의 취재수첩을 확인해본 후 다시 통화하자는 것이다. 그로부터 딱 10분 후 미국에서 다시 나의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미스터 리, 맞습니다. 당신이 말한 시각과 내 취재수첩의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하네요. 그때 당신은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와 인터뷰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지요?”

그는 자신의 취재수첩 몇 구절을 나에게 읽어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약간 더듬거리는 등 흥분의 기운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당장 원고를 써서 보내겠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이미 교정이 거의 끝난 상태라 번역하여 그의 원고를 집어넣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다만 영문본에 포함시키는 것은 가능할 듯싶었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하자 그는 상관없다면서 이틀 후 곧바로 내게 원고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 책의 출판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에 맞춰 그는 광주로 날라 왔다. 17년만에 신양파크 호텔 라운지에서 나는 그와 다시 만났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그에 대한 인상과 똑같이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우린 서로 한참을 껴안고 서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날 저녁 함께 식사를 마친 다음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두툼한 가방에서 뭔가를 한뭉치 꺼냈다. 5.18당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필름이었다. 기자로서의 본능적 호기심이 나를 자극했다. 꼼꼼히 살펴본 결과 놀라운 필름이 몇 컷 발견됐다. 그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것이 있었다. 도청 민원실 바닥에 반쯤 화염방사기로 시커멓게 그을렸지만 희생자의 얼굴 형체는 역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윤상원 열사의 최후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다음날 내가 다니던 신문 1면을 장식하는 특종 사진이 됐었다.

그때 이후 10년이 지난 뒤 엊그제 우리는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의 부인과 함께 3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서 ‘이재의’라는 이름을 30여 차례 넘게 들었다면서 ‘언젠가 꼭 한번 만나보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꺼냈다.

촛불집회, DJ와 노무현 정부 이후 광주지역민들의 5.18에 대한 정서와 광주시민들의 반응 등에서부터 자녀들 키우는 이야기, 미국과 한국에서의 생활 등 우리의 화제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10년 전 만났을 때와 달리 한국말을 제법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의 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도 역시 5.18로 인한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간에 이 역사적인 사건이 개인에게 남겼던 상흔을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미세한 감정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길 나눴다.          

“기자란 직업이 항상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는 일이다 보니 그때 광주에 와서 목격했던 일들이 너무 큰 충격이었나 봐요. 한동안 광주에 대한 이야길 자주 하면서 죽기 전에 꼭 광주에 가보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길 했어요. 그래서 80년대 후반 우리 가족들이 모두 함께 망월동 묘역을 찾은 적이 있었죠. 이분은 묘역의 희생자 사진을 보면서 당신이 찍었던 사진들과 하나하나 대조해보았답니다. 그 뒤로도 두어 차례 더 광주에 왔고, 그때 투쟁에 참여했던 분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어디로 연락할지도 모르겠고...”

1997년 광주에서 책자발간 이후 그의 모습은 놀라보게 달라졌다고 한다. 부인에 따르면 아마도 ‘뭔가 큰 짐을 덜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식당 문을 닫아야 할 10시가 돼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어컨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자 아스팔트에서는 열대야 기운이 아직 후끈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왔던 사람들이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친밀하게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밀한 감정이 나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쪽도 역시 마찬가지 느낌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큰 소리로 자주 연락하면서 지내자는 말을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재의 나노바이오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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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형주 2008-10-12 20:20:18
이야기를 읽어가며 눈물을 머금것이 몇회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이재의씨가 당시의 주인공 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구요. 그 당시 광주에 살면서 어느 누가 주연이 아니였겠습니까? 광주시민 모두가 주인공이지요. 그래서 5.18사건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었나봅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개인적인"나"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도 한편의 드라마가 도겠지요. 아무튼 좋은인연으로 남게되는 기자분과의 우정이 깊어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