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고야의 유령]들이 떠돌며 울고 있다.
아직도 [고야의 유령]들이 떠돌며 울고 있다.
  • 김영주
  • 승인 2008.09.09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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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의 영화로 보는 세상

연극과 뮤지컬의 무대를 별로 접하지 못했다. 광주에선 만날 기회 자체가 별로 많지 않은데다가, 티켓 값이 서민가격이 아니라 귀족가격이기도 하고, 한 번 만나는 데에 시간이 두세 배로 깨지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현장감이 좋기는 하지만, 맘에 든 영화에서 받는 감흥보다 못했다.


* [맘마미아], 재밌는 뮤지컬 & 김빠진 영화


뮤지컬[맘마미아] 표를 얻었다.  그리 땡기지는 않았지만, 30년 전쯤에 광주극장에서 보았던 다큐영화 ABBA에 흥겨운 감흥도 그립고 상당히 자자한 소문도 있고 해서, 시간낭비는 아닐 것 같았다.  달콤한 솜사탕 스토리는 말도 안 되면서 뻔하고 간지럽지만, 그런 속없는 설정과 간질거림이 대중재미를 줄 법 하니 널리 양해하기로 하고 ... .  상당히 재밌다.  소피와 다른 조연들의 연기와 노래는 대체로 봐줄만 하게 괜찮지만, 함께 부르는 노래와 춤은 주인공들을 잘 뒷받침해 주면서 탄탄하고 쫀득쫀득했다.  무엇보다도 도나 역의 이태원과 타냐 역의 전수경이 돋보였다.  이태원이 명성황후로 TV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잘 부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번처럼 감칠 맛나게 안겨오지는 않았었다.  음색도 좋고 노래를 소화하는 감각과 힘도 좋았다.  전수경은 노래가 덜 돋보이지만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빼어났다.  세 남자들 노래실력이 좀 서운했고 무대 장악력이 약해 보였다.  


내친 김에 영화[맘마미아]도 보았다.  그 짙푸른 쪽빛 바다 위의 우뚝 솟은 작은 섬 꼭대기에 소담스레 앉아 있는 새하얀 별장에 가슴 설레었다.  오랜만에 보는 메릴 스트립.  콧대는 역시나 그대로 우뚝하고 세월의 연륜을 담은 카리스마는 여전히 그대로 단단하지만, 노래가 그리 받쳐주질 못한다.  음색이 갈라지고 감칠 맛을 못낸다.  조연들도 노래나 춤이 고만고만하다.  물론 [시카고]에서 캐더린 제타존스처럼 놀랠 정도까지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뮤지컬인데 노래솜씨를 감안해서 캐스팅해야 하지 않겠나?  정히 배우가 욕심나면 귀신도 모를 입맞춤이라도 만들어내든지.  현란한 능수능란보다 털털한 소박담백이 오히려 더 깊은 맛으로 우러날 때가 없지 않지만, 이건 소박담백이 아니라 역량부족이다.  연출을 좀 더 화끈하게 밀고가질 못했고, 게다가 그나마 조금 달아오른 분위기마저 뚝뚝 분질러먹기까지 했다.  김빠진 맥주였다.  이야기를 [고야의 유령]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 고야의 치열한 예술혼, 국가와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다.


18세기 뒤쯤에서 19세기 앞쯤, 고야Goya는 왕실 귀족 성직자의 초상화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주문받아 그린 작품은 바로크하게 단단하면서 엄정하다.( 그러나 근엄 엄숙 고상 우아하게 미화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사치 허영 음흉 탐욕을 은근하게 비꼬아서 그린다. )  그러나 스스로 우러나서 그린 그림과 판화는 어둡고 침울해서 무겁고 으스스 기괴해서 무섭다.  처음엔 그의 이런 이중적인 그림이 의아했다.  그런데 고야를 찾아들어가 보니, 그는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자기만의 다락방’에서 예술혼을 치열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저 그림솜씨를 닦아내는 테크닉에 예술혼을 불태운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을 짓밟는 괴물들을 비꼬고 박치기하는 풍자에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 풍자의 대상이 어찌나 선명한지 그 시대의 상류층에게 그렇게 맞짱떠도 되는 건지 걱정되고, 그 격렬함이 어찌나 기괴한지 ‘현대예술의 막되 먹은 표현’보다도 훨씬 충격적이다.


그가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그리고 자연’을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존경했단다.  그림솜씨는 렘브란트보다 조금 못해 보이고 자연보다는 훨씬 못해 보이지만, 우리 인간의 추하고 비열하고 잔학함을 리얼하게 잡아내는 눈썰미는 렘브란트나 자연보다 더 나아 보인다.  후세에 드라크르와나 마네 그리고 피가소가 그의 그림을 배우고 본떴다고 하지만, 드라크르와의 풍자가 선명한 핏빛이 낭자한 참혹함이었다면 고야의 풍자는 검푸른 먹빛이 짓누른 침울함이요, 인상파impressionism가 찬연한 자연의 빛으로 세상을 생동하게 인상했다면 고야는 엄혹한 억압의 어둠으로 세상을 섬뜩하게 인상했으며, 피가소가 심장이 없는 차가운 로봇으로 <한국인의 학살>을 그렸다면 고야는 혁명의 탈을 쓴 맹목의 인간으로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을 그렸다.  고야가 국가와 종교라는 괴물을 향하여 이토록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며 인간 세상을 경고한지 어언 200여 년이 흘렀건만, 지금 우리 인간 세상이 겉으론 많이 나아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별로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훨씬 복잡하고 교묘해진 것 같다.  인간 세상에 미련을 갖는 게 이미 잘못인지도 모른다.


* 밀로스 포먼 감독의 노익장, 그러나 ... .


난 그동안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력을 틈틈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천일의 스캔들]에서 상당한 열연을 하였음에도 과장된 연기로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처절하게 망가졌다.  전도연의 연기가 좀 과장된다고 흠을 잡다가도 망가지는 연기를 전혀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듯이, 이번에 나탈리도 그랬다.  그녀는 도도하고 당당하다. 그래서 비싸게 구는 듯하지만 결코 얄밉지 않다.  좋은 일이다.  그녀를 또 기다린다.


로렌조라는 신부, 음흉한 권력욕의 화신 같은 이미지임에도 중요한 순간들에서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참 고마웠다.  영화가 관객을 빨아들이려면 짧은 시간에 핵심포인트만 잡고 선악을 강렬하고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러질 않고 악당이어야 할 그가 이런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거리고 소용돌이친다.  우리가 “사람은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아무리 되뇌이고 새기려 해도, 겉모습에 흐르는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걸 막기 어렵다.  그걸 각성시켜주니 고맙다.  마지막 그의 모습을 좀 더 짜임새 있게 섬세하게 묘사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 .  맨 끝 장면이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함축하려 한 것도 같기도 해서 조금 다르게 처리했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고야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그 주변의 다양한 군상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로 그 시대상을 그려가는 관찰자이다.  그 사이에 깊이 끼어들다가도 결국은 관찰자로 물러선다.  고야는 감독 자신이다.  감독이 고야를 그만큼 흠모하고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밀로스 포먼 감독, 그는 영화 보는 내 눈이 어리버리했던 30여 년 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영화 보는 내 눈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던 20여 년 전 [아마데우스]로 영화100년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이번 [고야의 유령]으로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그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대중재미가 Bo는 되어 보이는데, 영화기술이 Ao이고 삶의 숙성이 A+로 너무 높았나?  그 Ao와 A+인 게 아마 ‘구닥다리 영화’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주 비슷한 영화 [진주귀걸이 소녀]도 이런 찬밥 대우를 받더니, 세상인심이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이런 흐름을 어디서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고맙게도 ‘구닥다리 극장’ 광주극장에서 늦게나마 이렇게 상영해 주어서 참 감사하다.  그 젊은 사장님한테 밥이라도 한 번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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