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을 예정으로 진도로 떠났던 작가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 진도의 해변과 진도만의 고유한 삶의 풍경을 넉넉하게 담아 전시회도 했다. 새로 마련한 작업실은 아직 정리가 덜 되고 작았지만 워낙 튼실한 마음인 작가는 충분히 모든 것을 안고 있었다.
삶이 쓸쓸하고 쉽지 않을 것이기에 더 늦기 전에 떠난 길이었다. 작가는 그곳에서 삶의 등대 불을 찾았고 다시 먼 길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더 깊어진 눈빛으로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돌아 온 만큼 이제는 제 자리에서 두 발로 서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견뎌야 할 일이다.
길은 끝이 없어 길이다. 지나온 길은 짧고 갈 길은 아직도 멀어서 길이다. 가던 길, 차마 멈출 수 없어 길이다. 한 굽이 돌아서면 잊히고 또 한 굽이 돌아서면 떠오르고 길마다, 굽이굽이 사연마다 갈래갈래 가슴을 짓이겨서 길이다.
길이 없는 곳에서도 끝나지 않아 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이라도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기에 길이다. 마냥 끝이 없어 길이다.
가슴 가득한 황톳길을 따라
작가가 진도에서 작업한 것은 황토다. 수채(水彩)로 그림을 그리고 좌, 우로 이분된 화폭에 황토를 발라 영원의 느낌을 나타내 우주를 담았다. 작가에게 화폭은 그것이 크던 작던 하나의 우주였다.
그가 깨달은 것은 우리 땅 ‘진도’의 아름다움과 만물생성 근원인 ‘물’과 영기(靈氣)의 속성인 ‘순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모두 삶과 연관되어 끊임없이 순환한다. 작가는 모든 것은 소멸과 생성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순환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소멸과 생성, 순환의 구조는 ‘살아있음과 앞으로 살아갈 모든 것들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자운영을 주로 그렸다. 연보라 빛 꽃이 피고 땅으로 돌아가 썩어, 다음 해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자운영’과 그것을 말없이 담아주고만 있는 넉넉한 ‘황토’, 그 속을 유유히 유영하는 ‘물고기’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소통방법이다.
황토 위 소박한 몇 개의 문양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우주관, 생명관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자연에 대한 작가의 배려다.
이런 기본적인 바탕이 그를 2008년 8월 대동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의향 남도의 현충 유적 답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불원복(不遠復)-그대 산화되어’라는 작품으로 역사의 질곡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남인들의 절절한 삶을 부유하는 하얀 찔레꽃으로 표현했다.
화폭 안에는 바람에 몸을 맡긴 하얀 꽃들. 나라를 지켜낸 호남인의 단호함이 그려져 있다. 태양과 비바람에도 삭지 않고 더욱 촘촘해져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시간의 그물이 보인다.
다시 창을 열고 숲에서 길을 만나다
요즘 작가는 다시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자신의 그림에 창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모든 그림은 마땅히 벽에 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그림들은 이제 창가에 세워지기를 희망한다. 창 너머 다른 세계를 바라볼 때 자신의 그림이 공간과 매개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림들이 창가로 걸어 나온다. 그림은 평면인데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창과 어우러져 입체다. 창틀이 열어져 공간을 보여주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원하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다해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열린 소통을 즐긴다.
창의 모양은 다양하다. “바라보아 감상에 방해가 안 되고 단지 그림을 보는 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현재의 작업을 하게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수채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 수채가 갖는 한계성에서 탈피해 좀 더 깊은 맛을 찾아 일반적인 소통을 하고 싶은 것이라 한다.
“수채화 작가는 몇 명이 채 안 된다. 아마 수채가 주는 느낌도 있지만 더 다양한 어떤 것을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냥 위만 보며 오르고 넘는 것이 삶의 목표인양 소리도 없이 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면벽(面壁)하여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어느 날, 대열에서 이탈한 담쟁이 한 줄기가 거꾸로 서서 유리창 안 다른 세상을 가만히 엿본다. 어딘가 깨어있을 샘을 그리워하며 씨실과 날실을 이용해 희망을 짜깁기 한다.
프롤로그
배가 고팠다 / 해동은 넘겼으나 / 그 봄엔 씨감자 한 톨에도 회가 동했다 / 헛것을 보듯 빈 논에 어른거리던 / 보랏빛 구름 /보리가 나기까지 / 대칼 부엌칼 닥치는 대로 들고 나섰다 / 나물죽 쑤어 헛배 채워도 해는 길어 / 마른 논바닥에 버짐같이 번져 나던 / 자오록한 희망을 아십니까 // 공출미 씨나락에 비료 값 쪼개면 / 갚는 빚보다 느는 빚이 늘 많았다 / 어머니 넋 놓고 바라보시던 / 가슴팍 갈라지게 빼앗겨만 온 세월 삭은 논바닥 / 한숨같이 피어오르던 꽃 / 자운영을 아십니까 // 이런 건 가져가서 무엇에 쓰겠냐고 / 고운 때 묻은 옥돌 다음이 쓰다듬으시더니 / 빈손으로 떠나온 땅 흰 고무신 코에 / 눈물같이 지던 꽃 / 그 꽃을 아십니까. - 자운영 꽃을 아십니까? (작가 이 경)
우리는 태어나면서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지닌다. 삶의 애착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아득히 지나가 버린 과거의 화석이다.
노트북을 연다. ‘윈도우(windows)’를 만나면 화면 안 다른 세상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간다. 모두가 들어갈 수 있지만 개개인이 느끼는 각기 다른 세상이다.
그가 만나는 세상도 자신의 그림에 설치되어 있는 창으로 연결된다. 낯익었던 세상이 낯설어지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세상의 저편, 그림자 없는 우주에 해가 뜨고 달이 녹고 별들이 사라진다.
바람보다 가벼이 떠오르는 기억들, 기억의 징검다리 건너 더욱 깊고 엷어지는 마음으로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본다.
작가는 교사다. 이제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내 아이의 담임이었다. 넉넉할 만큼 자신을 채우고 돌아와 고맙다. 마음이 갈 때마다 한 번씩 찾아 맥주 한 잔 같이 할 수 있어 더 기쁘다.
문의 : 019-642-0591
▲ 김종안 작가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수채화개인전 ‘섬 그늘에’-무등 갤러리(2001) / ‘유영-가던 길 멈추고’-롯데화랑(2004) / ‘생’-신세계갤러리, 서울 단성갤러리(2007) -2008기획전 나라사랑과 예술전(무등갤러리,광주시청) / 부산 비엔날레 아시아수채화대전(부산문화회관) / 남도의식의 확산전(자리아트) / 한국수채화 페스티발(성남아트센터) 등 참여 現, 한국수채화협회, 수채화작가협회, 광주전남수채화협회회원, 대한민국수채화전람회 운영위원, 광주시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과 배려로 가득한 넉넉한 미소가~
선생님의 작품속에 어머니가 보입니다.
모진 세파에 힘들고 뜨거운 태양아래 그을려도 너무도 아름답고 그리운 얼굴이~
선생님 작품을 통해 밋밋한 삶의 여백을 채워갈 수 있어 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