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영혼을 담아 새기다
나무, 영혼을 담아 새기다
  • 범현이
  • 승인 2008.08.2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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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국립묘지 ‘민주의 문’ 서각가 금정(金井) 김기표(51)

▲ 5·18 현판.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어른 동화가 있다. 서각가 금정을 보면 제목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자신의 몸 자체가 조각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한 그루 나무다.

팔을 벌리면 온 몸 가득 초록이 묻어 나오고 다섯 손가락 사이에서는 조형과 아름다운 미감이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형태를 형성한다.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깊게 가라앉은 끝을 알 수 없는 조형의 세계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자신의 허리가 잘려 나가도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내준다. 금정 역시 자신의 오감, 모든 것을 동원해 성실하고 간곡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가 완성한 서각은 그것이 글씨든, 문인화든 하나의 어떤 개체로서 생명감을 갖는다.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다. 그 안에 그가 한 그루 나무로 살아 숨 쉬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벌거벗은 채 보여준다. 그는 천 년, 느티나무다.

▲ 서각가 금정(金井) 김기표씨.

손톱 끝, 생명력으로 산하를 물들이다


그의 봉숭아 물들여진 손톱 끝에서는 생명이 품어져 나온다. 붉고 선연한 빛깔만큼이나 질기고 깊은 생명력이다.

칼을 손에 쥐고 각(刻)을 세우고 둥글게 모서리를 정리하며 30여 년을 보냈다. 산하 곳곳, 제자리에 앉혀진 서각과 현판들이 산하를 물들이며 이제는 한 몸으로 역할을 해낸다.

꽃 피는 봄이면 흐드러 지는 꽃들과 가족이 되고 붉은 채 선연한 단풍 드는 가을에는 붉은 빛으로 같이 어우러지며, 눈 내리는 겨울에는 머리에 눈을 인 채로, 앉혀진 자신의 자리를 보살핀다. 금정 스스로가 자신과 얽힌 인연에 따라 몸 일부를 자연에 보시(普施)한다.

“못나서 다른 곳을 쳐다볼 기회도 없었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너무나 타오르는 열정이 그를 서각에 집념하며 천착하게 만든다. 독특한 나름의 세계가 분명하다.

그가 만들어낸 서각작품은 일반적인 서각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날을 새며 어둠 속을 갈고 닦아낸 빛나는 조형이 살아있다. 재해석한 미감 역시 탁월하게 눈에 보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길 만을 올곧게 달려온 장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이 느껴질 정도다.

일에 있어서 너무나 명민할 정도로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몇 년이 걸려도 적확(的確)하다. 누구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 안에 그가 있다.

▲ 서재필 기념관-개화문 현판

광주의 상징, 민주의 문은 스스로 열려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세계는 얼마나 크고 깊은가. 마음이 열리고, 눈앞을 스쳐 지나는 그 수많은 사람과 자연과 인연들을 자기만의 필터로 걸러내고, 다시 사유하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사람이란 저마다 개개의 우주다.

나무로 표현되는 금정의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천만번의 손길이 지나 비로소 완성되고 광주를 상징하는 ‘민주의 문’은 열렸다. 차마 말로는 다하지 못했던 기원과 험난한 바람들이 모이고 모여 가장 편안하며 가장 부드러운 질긴 현판이 되었다.

작가는 “특별히 마음을 쓰는 일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만이 갖고 있는 작가의 고유성이 무등산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상 아파하는 모든 것을 품어내는 둥그러진 ‘민주의 문’을 각인하게 된 것이다.

그가 숨결을 불어넣고 영혼을 담아낸 작품에는 모두가 간절함이 담겼다. 5`18국립묘지의 ‘민주의 문’, ‘역사의 문’, 보성 서재필박사 유적지의 ‘개화문’, 옥과 성륜사의 현판 및 주련, 담양의 ‘한국가사문학관 현판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장 편안하면서도 누구나 친근감이 가는 우리네 돌 담 같은 푸근함과 언제 어디서 만나도 낯설지 않은 민중의 소망이 주저리주저리 담겨 있다.

▲ 서각작품-일신

언제나 한마음인 한 그루 느티나무로


금정은 요즘 느티나무에 마음이 꽂혔다. 이곳저곳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삼백년과 천년된  묵은 느티나무를 만나던 날, 그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한다. 나무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친근함이 전부인 나무, 분신을 만나러가는 행운이다.

▲ 보이차-다상
처음 운림산방의 남농 선생으로부터 호인 금정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느티나무의 자연 무늬와 색깔에 완전히 매료되어 만드는 작품의 기본적인 모든 재료가 거의 느티나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나무의 아름다움을 세계, 어떤 나무도 따라올 수 없다”고 단언하는 우리나라 수종의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망설임 없이 나무를 건조한다. 아이를 돌보듯 내버려 두는 듯,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들여다보며 말리는 2년 정도의 과정이 끝나도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야무지게 칼을 받아들일 시기를 금정은 다년간의 경험과 살 붙이 같은 민감함으로 감지한 후에야 비로소 작업에 임한다. 섬세한 작업으로 인해 떨어진 나무 조각 하나로도 수종을 알아맞힐 수 있는 혜안도 가졌다.

10월이면 새로운 작업장으로 이사한다. 더 늦기 전에 그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다. 인내심 강한 제자도 두고 싶고, 늘 등 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준 아내와 가족들에게 감사할 일도 그 중 하나다.

소목을 제작할 예정이다. 누구나 소장하고 싶어 하는 우리 고유 가구에 현대의 조형성을 가미한 작품이다. 세계 어떤 나라의 수종들과도 견줄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나무를 사용해 만들 것이다.

“냉, 난방이 잘 되어있는 아파트에서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나무 고유 성질인 수축과 팽창이 가능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잘 어울려 제 빛을 내는 그런 가구를 만들 것이다”며 자신의 말과 스스로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 봐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작품을 어우르며 자리 봐서 앉혀주고 자리 봐서 걸어주는 일들을 계속한다. 시간이 지나도 내 피붙이처럼 곁에 두고 언제나 들여다 볼 수 있는 가구, 늘 새것 같은 손 때 묻어가는 연륜의 가구, 100년이 지나도 낯설지 않은 가구를 만드는 것이 금정의 새로운 꿈이다. 그는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인연의 끈이다.

문의 : 011-9665-2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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