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천국을 꿈꾸다.
이방인, 천국을 꿈꾸다.
  • 범현이
  • 승인 2008.08.15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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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빛으로 소박하게 부활한 염색작가 김현덕(46)

▲ 염색작가 김현덕.

고등학교 재학 중에 광주 시내 문예 부장 모임이 있었다. 같이 시(詩)와 소설(小說)을 토론하며 공부하기도 했었고 도청 앞, 가로수에 시화 액자를 걸어 5월 시화전을 갖기도 했던 조금은 당찬 모임이었다. 집시법 위반으로 배후세력을 추궁 당하기도 했고 경찰서에 불려가 사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김 현덕은 매우 명철한 의식과 깊은 의식을 지닌 소년이었다. 물론 시도 아주 잘 썼고 다른 회원들의 소설에 대해 매섭고 눈물을 확! 쏟을 만큼 정당하고 이유 있는 악평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홀연히 염색가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갈옷-감물 염색이라고 했다. 둥글납작한 얼굴에 풀어헤친 머리, 통으로 치마인지 웃옷인지 구분 안 간 염색 옷을 입고 그가 나타났다.

함평. 그곳에 그가 있다. 흔들리며 온통 푸른 물로 잘 익어가는 하늘 닮은 쪽을 직접 재배하며 한여름에도 차가운 물에 염색한 천을 수십 번 헹구기를 반복하는 일상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염색은 절대 거부다. 신체구조조차도 습관성에는 두드러기가 돋는다. 하루하루가 실험의 연속이고 매일 매일이 삶의 작업 선상에서 치열한 파노라마다.

마냥 흐르는 물이 모래 틈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흐르는 것은 스며들기에는 너무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작가가 색과 빛으로 세상에 다가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청화백자 느낌 재현.

모슬포는 인생의 절박한 전환점


한 번이라도 큰 나무 아래 서 본 적이 있는가. 가지가, 그 수만 가지가 앞으로 틀어졌다 뒤로 꺾어지고, 옆으로 맞추고 돌아가면서 마치 튼튼한 집을 짓는 것처럼 각을 맞추고 서 있는 모습을.

사람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채울 곳은 채우고 비울 곳은 비워가면서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 땅 위에서 가장 반듯하게 서 있는 나무는 작가와 너무나 닮았다.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늘 생각하는 나무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1997년, 제주도 모슬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의 갈옷은 그에게 운명을 남겼고 그는 곧 한그루 반듯한 나무가 되기 위해 고통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염색은 삶, 그 자체이다.

날마다 실험으로 가득한 염색들이 이루어지고 부단히 만들어져 나오는 살아있음의 증거로 인한 믿음이다.

처음에는 흙을 이용한 우리 산하의 광물 염색에 주력했다. 흙에서 우리 정서를 찾고자 했다. 어떤 장식도 이유도 배제한 광물염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광물에서 오는 투박함이 개인적인 정서일 뿐 대중화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쉽게 더러움에 익숙해지는 광물 염색의 대체 방법과 탈출구를 찾아내기에 열중했다. 가장 염두에 둔 것은 ‘타성에 젖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작가의 역량을 탁월하게 키워내는데 적지 않은 분량의 완전한 희망을 제공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원하는 자리에 온 사람만이 갖는 진중함, 그와의 대화는 느릿하지만 주제에서 한 치의 벗어남 없이 조용히 이어진다.

▲ 감물염색으로 만든 구두.

모든 것은 완전한 수(手)작업으로 변함없이 이루어져


모양과 형태가 빛으로 완전하게 완성되어간 것은 수년의 실험을 반복하고서다. “감 염색만큼은 일본을 넘어서 세계1인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비단에도 감물염색을 한다.

일단 부드럽던 비단이 염색이 되면서부터 뻣뻣해지는 특유의 성질도 연구와 노력으로 잡아내고 비단이 갖는 고유의 성질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10년이 넘은 실험이 비로소 3년 전에야 결실을 얻었다”고 작가는 빙긋 웃는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한없이 조용하지만 그가 갖는 염색에 관한 사랑만큼은 치열하다.

▲ 감물 염색된 옷감들.
감물로 인한 모든 색들이 가능하다. 색 도표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다. 언뜻 이해가 안가지만 그의 설명을 듣다보면 저 생각의 깊이는 어디까지 일까하는 가슴 먹먹한 느낌을 털어 낼 수가 없다.

감물에 갖가지 식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을 혼합해 자기만의 비법으로 화려한 색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으며 건강함을 추구하는 가구를 만들고 색을 칠하는 도료로도 사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완전한 우리 고유의 천연염색이 실생활 모든 곳에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요즘은 청화백자 느낌의 재현에 푹 빠져있다. 푸른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청화가 우리 민족의 고유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직접 재배한 쪽을 이용한 염색은 한 번의 염색 후 뜨거운 물에 담아 발색을 억제하는 것이 기술이다.

자세히 보면 그냥 염색이 절대 아니다. 그가 만들어 낸 염색 천에는 그림이 그려진다. 나뭇잎, 배 모양뿐이 아닌  온갖 문양 등이 등을 돌린 채 무심한 듯 그려져 있다. 그는 치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작업만이 연출해 낼 수 있다고 단언한다.

에필로그

▲ 감물염색으로 만든 옷들.
12년 다닌 대학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철학이었다. 그가 살아 온 삶은 더도 덜도 아닌 소금 뼈다. 물도 뿌리가 있고 나무도 꽃들도 뿌리가 있는데 늘 마음의 뿌리를 다잡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살아왔던 세상이다. 내가 인지한 바는 적어도 그렇다.

유리벽 밖에서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방인이었다. 훨훨 세상을 버리고 인연이 떨어지면, 이 구석 저 구석 메마른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다시 거름이 되어서 다른 나무 잎이 되고 싶은 막막한 날들이었다.

그렇게 흐르다가 염색을 만나 그는 다시 타올랐다. 세상이 넓어 보였다. 아득할 정도로 넓어 보였다. 세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역시 내미는 손을 잡았다.

하루 종일 물 꿈을 꾸던 날이 있었다. 모든 것이 미끄러웠다. 날개에는 바람이 가득하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탄생하는가하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물 꿈은 늘 그랬다.

탄생과 사라짐이 거듭하는 동안 정말로 별 하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별은 내 가슴 속에 뜨면서 속삭인다.
‘아직도 남아 있어. 네겐 아직도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남아있어’ 소금 뼈의 눈물이었다.

문의 : 011-9451-0259

▲ 작가의 염색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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